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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존엄사 유언장’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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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웰다잉법’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5개월,

임종기 연명치료 거부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자 3만497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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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7일 토요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행신동에 있는 초등 대안학교인 ‘고양우리학교’. 학부모 30여 명이 교실에 모여 있다. 이날은 ‘웰다잉-나와 배우자의 죽음 준비하기’ 부모교육 강좌가 열리는 날이다. 이들은 주말 반나절을 반납하고 강좌를 들으러 학교에 왔다.

이날 강좌를 맡은 이는 ‘웰다잉 강사’ 정은주씨다. 이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학부모다. “우리는 누구나 죽는데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린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부정 탄다고 하지 말라 하고, 죽을 사(死)와 음이 같은 숫자 4를 피하고, 4층은 F로 되어 있다. 죽음을 마주할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정씨는 ‘죽음 강의’를 하며 만난 많은 사람이 죽음 이야기를 하면 ‘살기도 바쁜데 굳이 죽음을 준비해야 하나?’ ‘죽음을 준비한다고 큰 의미가 있을까’라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정씨는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나의 마지막을 생각하며 산다는 건 현재의 삶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나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

30∼40대 학부모에게 이날 강좌는 ‘죽음’을 주제로 한 첫 강의다. 학부모들이 강사가 나눠준 ‘소원 노트’를 펼친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첫 장에 있는 질문에 답을 적는다. ‘나는 ○○○에서 태어나 ○○○와 함께 자랐다’ ‘요즘 나는 ○○○○을 즐겁게 하고 있다’ ‘요즘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이다’. 다음 장에는 ‘죽음에 관해 이야기해봅시다’가 있다. 직접 경험한 첫 번째 죽음은 어떤 죽음이었는지, 아이였을 때 가족에게 죽음을 어떻게 전해들었는지, 나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인지 묻는다. 처음 듣는 질문에 답을 적는 걸 머뭇거리는 이도 있고,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이도 있다.

강좌가 끝난 뒤 학부모 중 6명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임종을 앞두고 인공호흡기, 심폐소생술, 항암제 투여, 혈액투석 등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며 건강할 때 본인이 미리 써두는 ‘존엄사 유언장’의 법정 명칭이다.

“평화로운 죽음을 맞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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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쓴 성미경(40)씨는 “마흔이 되니 살아온 날들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며 “더불어 삶의 끝인 죽음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성씨는 이날 강좌에서 ‘나는 마침내 자유로워졌다’라는 묘비명 글귀에 크게 공감했다. “기후학 분야를 연구하고 있어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인류에 도움이 될 만한 기후학 연구 성과를 남기고 싶어요.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살아야겠죠. 그렇게 살다 죽음이 오면 ‘아, 이제 쉴 수 있구나’ 그런 느낌이 들 것 같아요. 영원한 쉼 같은 거요.” 자신이 원하는 마지막 모습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하지 않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는 것”이다. 그가 이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쓴 이유도 그것이다.

‘웰다잉법’이라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하 연명의료결정법)이 올해 2월4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 법은 적극적인 치료에도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환자에게 ‘회생 가능성’이 없고 ‘임종 과정’에 있다는 의학적 판단 아래 불필요한 연명의료를 중단하고 자연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 법에 따라 19살 이상이면 인공호흡기 장착, 심폐소생술 등 치료 효과와 상관없이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의료 행위를 받을지 말지 미리 자신의 뜻을 밝혀놓는 문서인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다. 의료기관에서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내릴 때 참조할 만한 일차적 자료인 동시에 건강할 때 삶을 돌아보고 죽음을 준비하는 웰다잉을 위한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따르면,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된 지 5개월 동안 3만4974명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남성이 1만1851명, 여성이 2만3123명으로 나타났다. 연령별로 보면 70~79살이 40.2%로 가장 높고 그다음이 60~69살(23.5%), 80살 이상(17.2%), 50~59살(12.7%), 30~39살(1%), 30살 미만(0.8%) 순이었다.

가족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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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잘 사는 것에만 애를 쓰고 잘 죽어가는 것은 터부시하거나 외면하고 있다. 웰다잉문화연구소 김조환 소장은 “유교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은 현세 중심적이다. 이 때문에 죽음을 혐오하고 무서워한다”라며 “죽음을 피하며 의미 없는 연명치료에 집착한다”고 지적했다.

웰다잉 강사 정은주씨는 현대인 대부분이 병원에서 준비 없이 외로운 죽음을 맞는다고 했다. 실제 통계청 ‘사망 원인’ 통계에 따르면 2016년 사망자(28만827명) 중 21만292명(74.9%)이 병원에서 숨졌다. 이른바 ‘병원 객사’다. 반면 가정에서 편안하게 숨진 재택 사망자는 4만3082명(15.3%)에 불과했다. 정씨는 “병원 중환자실에서 임종 준비를 못하고 치료 효과 없는 연명치료를 하다 고통 속에서 죽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지켜보는 가족에게도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고 말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1호 등록자’인 대한웰다잉협회 최영숙 회장은 호스피스 봉사를 하면서 웰다잉에 관심 갖게 됐다. 그전에는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최 회장은 웰다잉 논의가 활발해지려면 죽음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죽음의 질 지수 1위로 꼽히는 영국에서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데스 카페’가 있어요. 어린이에게 죽음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죽음 알림 주간’이라는 행사도 열어요.”

김 소장 역시 건강할 때 미리 ‘죽음’을 고민하고 가족과 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를 계기로 마지막으로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면서 가족과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자식과 부모가 연명치료를 할지 미리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요.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혀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가족끼리 죽음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어요.” 김 소장은 아울러 죽음에 대한 조기 교육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모들은 아이가 어릴 때부터 낙엽이 떨어지는 것, 봄·여름·가을·겨울의 계절 변화를 설명하며 삶과 죽음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웰다잉의 시작이에요.”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것

죽음을 긍정적으로 보면 더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대한웰다잉협회 최영숙 회장은 “삶과 죽음은 같은 연속선상에 있다. 나뉜 게 아니다. 이 때문에 진짜 제대로 된 삶을 살려면 죽음을 알아야 한다. 잘 사는 것이 곧 잘 죽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존엄한 마무리를 위해 사진 자서전, 유언장 쓰기,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 만들기,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 등을 할 수 있다. 잘 살아가기 위해, 잘 죽기 위해서 말이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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