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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16)우익 정치자금은 어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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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재원은 미군정에서 지원…‘반강제 모금’과 ‘적산’ 매각해 추가 조달

경향신문

좌익·우익 모두 돈이 필요

군정, 좌파는 지원하지 않고

우파엔 의원 비서 월급도 제공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정치를 할 수 없다. 해방 직후 미군정하에서나 민주화가 된 이후의 한국 사회나 모두 돈은 통치행위뿐만 아니라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된다. 선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돈이며, 이로 인해 당선무효형을 받는 사람이 적지 않다. 불법임에도 불구, 돈을 쓰지 않고는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에 선거 때마다 정치자금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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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에도 돈이 필요했다.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한반도에 수립된 미군정은 초기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46년 소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선공산당 수뇌부는 월북하였으며, 조선공산당은 남조선노동당이라는 대중정당으로 전환하였다. 물론 정판사 사건의 진상을 둘러싼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임성욱,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재검토 : 제1심 판결의 모순점을 중심으로”, 역사비평 114호). 북한 역시 70년 동안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으면서도 버텨왔지만, 오바마 행정부 시기 방코델타은행 자금을 동결한 미국의 정책이 북·미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 세력들이 지방에서 권력을 장악해 나가는 과정에서도 많은 돈이 필요했을 것이다. 독촉국민회의 지부를 꾸리기 위해 사무실이, 사무실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독촉국민회의 회원들이 지방 유지라고 할지라도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돈이 충분한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들과 연결되어 있었던 청년단에는 더더욱 물질적 혜택이 필요했다. 특히 소련군 치하에서 내려온 청년들에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제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돈 없이 이들을 포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우익 계열의 조직에는 지방 유지와 자산가들이 많이 참여했기 때문에 좌익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질적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 자산가들이라고 해서 무한대로 자금을 지원하기는 어려웠다. 경찰의 횡포에 항의한 것은 시장의 소상인, 일반인들만이 아니었다. 자산가들 역시 정치자금이나 경찰들이 요구하는 금품에 불만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은 어떻게 자금을 마련했을까? 1차적인 재원은 미군정이었다. 본국에서 충분한 원조를 하지 않아 미군정에 충분한 재정적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의 대한정책에 도움이 되는 정치인들을 후원하기 위한 재정적 지원을 해야만 했다. 특히 해방 직후 강력한 좌익세력으로 기울어져 있던 운동장의 기울기를 우익 측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일정한 지원이 필요했다.

좌익 측의 연합체였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는 일절 지원이 없었지만, 이승만의 친구이자 미군정의 정치고문으로 입국한 굿펠로의 공작에 의해 조직된 우파 민주의원에게는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민주의원의 성원들뿐 아니라 그 비서들에게까지 월급이 지급됐다. 또 굿펠로의 조정 아래 자산가들에게 돈을 걷어 사용하기도 했다(정병준, “우남이승만 연구”, 580~600쪽).

이와 관련, 버치 문서군에 있는 1946년 6월14일자 버치의 개인 메모에는 미군정이 지원한 정치자금 액수가 적혀 있다. 총 1400만엔의 자금 중 이승만에게 1000만엔(5월24일 전달), 민주의원 100만엔, 독촉에 15만엔, 여자국민당에 5만엔, 민족청년단에 10만엔이 전달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돈은 자산가들로부터 모금한 것으로 보인다. 버치에 의하면 굿펠로는 돈을 낸 자산가들에게 한국 정부가 수립되면 이 돈을 다시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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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만엔”이라는 제목의 날짜 미상의 문서에는 굿펠로가 먼저 제안한 게 1000만엔이었다(버치 문서 박스 2). 이승만은 자금 제공자들에게 영수증을 써줬다. 문서에 의하면 자금 제공자들은 자금이 사적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10인으로 이뤄진 위원회 구성을 제안했지만 이승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금 지원자들의 생각과 달리 이승만에게 제공된 돈은 그의 개인계좌에 입금되었다. 그리고 굿펠로 대령은 버치 중위가 동석한 자리에서 자신이 한국을 떠나기 전에 입금을 독촉했고, 이로 인해 자금 모금이 빠르게 진척되었다.

자산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친일파들을 감싸주고 있던 이승만을 지원하는 것이 정부수립 이후 보험을 들어놓는 것과 같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이 향후 수립될 정부의 수반이 될 것이란 보장이 없었다. 따라서 하지 사령관의 정치고문 굿펠로 대령과 정치고문단 버치 중위의 중재가 없었다면 자금 모금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유일한 정부였던 미군정이 보장해주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미군정이 민주의원에 지원한 돈을 아무런 회의도 없이 이승만에게 제공했다가 문제가 된 사건도 있었다. 이승만의 미국 방문을 위해 민주의원에서 어떤 의결도 없이 50만엔을 지원한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아무것도 없었고, 민주의원의 해산을 명령했다(“민주의원”, 1946년 12월5일, 버치 문서 박스 2). 물론 1946년 가을 이승만에게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한 이후 미군정의 자금 지원은 좌우합작위원회를 향했다. 그러나 그 액수는 이승만에게 지원한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작은 액수였다. 하지 사령관은 1946년 10월14일 좌우합작위원회에 300만엔의 자금지원을 지시했다(버치 문서 박스 4). 그러나 바로 지급되지 않았다. 좌우합작위원회를 주도하고 있던 김규식은 미군정에 지급을 빨리해달라는 요청 문서를 보내야만 했다(버치 문서 박스 4).

이승만을 제외한 다른 정치인에게 자금을 지원한 사람은 탄압을 받았다. 여운형의 친구이자 백만장자인 한 사업가는 여운형 장례식에 10만엔을 냈다가 8월13일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집에서도, 체포 후 황금정 서클에 있는 경찰서에서도, 본정경찰서에서도 맞았다고 한다(“예방체포”, 1947년 8월18일자, 버치 문서 박스 4). 1980년대 신군부하에서 야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해체됐다는 소문이 나돈 국제그룹 사건의 기원을 보는 듯하다.

‘이승만 펀드’ 사실상 강제 모금

기업을 대상으로 모금액 할당

내지 않으면 보복을 당했다


두 번째 자금 조달방식은 반강제로 이뤄지는 모금이다. 특히 1946년 말 이승만의 미국 방문 시 이루어졌다. 1947년 2월에 작성된 “이승만 펀드” 제하의 문서는 그 내용을 잘 보여준다(버치 문서 박스 2). 조선일보는 10억엔의 목표액을 정해 놓았고, 2000만엔 정도를 모금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발적 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조선은행 직원들은 월급의 3분의 1을 기부했다고 한다. 인천의 직물공장에서도 모금 캠페인이 진행됐다. 또 조선피혁회사의 사장이 모금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속되기도 했다. 미군정의 결론은 모금이 광범위하게 불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경찰이나 청년단과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한 사업가는 이승만에 대한 추가 자금지원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사법부로부터 연락을 받기도 했다(“민주의원”). “이승만 펀드” 문서에 의하면, 모금액 중 50만엔이 한국을 방문한 미국 언론관계자들 접대에 쓰였고,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의 정책이 비민주적이며, 반한국적이라고 믿도록 했다고 한다. “더 많은 돈들이 언론인들을 흔들고, 지방 입법의원들을 접대하고, 반미선전에 쓰이고 있었다. 이러한 모금은 불법적일 뿐 아니라 사령관의 정책에 반하고 있다. 이승만의 활동을 돕기 위해 모금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법이다. 강제적인 모금도 그렇지만, 엔을 달러로 합법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경상북도와 같은 지역에서는 이 모금이 미군정의 허가 아래 이뤄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입법의원 정책”, 1947년 1월2일자 버치 문서 박스 2).

일제가 남기고 떠난 ‘적산’

군정은 여운형 견제 위해 만든

사민당에 물품 불하, 폭리 용인

그 부담은 모두 국민 몫이었다


셋째로 일본인이 남기고 간 자산(적산)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1945년 12월 미군정은 법령 33호를 통해 일본인의 공공재산뿐 아니라 개인재산까지 모두 압수를 선언했다. 국제법적으로 보면 불법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으로부터 한국의 미군정에 대한 지원이 인색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평화협정에는 1945년 직후 구 일본 점령지역에서 미국 기관이 취한 모든 재산과 관련된 결정을 일본 정부가 수용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한일협정 체결 시 배상금을 요구하자, 식민지 조선에 있었던 일본인들의 개인재산이 압수된 것이 배상금보다 더 크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 재산들이 1948년 미군정으로부터 한국 정부로 이양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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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남긴 재산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집과 공장이었다. 미군정뿐 아니라 1948년 이후 한국 정부는 적산을 민간에 팔고 그 돈을 정부 재정에 중요한 부분으로 이용했다. 또 싼 가격에 적산을 불하받고 그 대가의 일부를 정치자금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특히 미군정하에서는 적산 관리를 미국인들이 담당했기에 한국 정치인들의 정치자금으로 전환하는 것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정치자금 마련은 일본인 회사에 남겨져 있는 물품을 싼값에 넘기는 것을 통해 이뤄졌다. 여운형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사회민주당을 만든 미군정은 그들에게 자금 지원을 약속했지만, 이를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 상황에서 사회당은 서대문구에 위치한 ‘중외무역주식회사’라는 수출입 회사가 갖고 있는 물품을 통해 정치자금을 마련하고자 했다. 500만엔 정도의 자본금을 가진 이 회사는 안양에 2만여개의 시멘트 부대 자루, 평택에 재목 10만 피트, 유리 제조에 쓰이는 ‘소다비’라고 하는 재료 100t 등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 다른 품목들이 수색 근처와 영등포에 있었다고 한다. 사회민주당은 이 품목들을 인수해 생기는 이익을 정치자금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1946년 7월1일자 사령관에게 보내는 메모). 이 제안은 사회민주당 측에서 했지만, 버치 역시 이 제안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입장을 피력했다. 군정은 곧바로 검토에 들어갔다(“오래된 재목, 지붕틀, 그리고 타일 등의 배분 신청”, 1946년 7월23일자, 버치 문서 박스 4). 이후 1946년 10월5일자, 10월11일자 문서에는 이 품목들이 재생 후 판매를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넘겼다는 내용이 있다. 중외무역주식회사는 1946년 11월4일 하지 사령관에게 청원서를 냈다. 여운형의 동생인 여운홍 사회민주당 대표와 강태연 중외무역 사장 명의로 돼 있는 이 청원서에는 창당자금(5118엔), 당 사무원 월급(4만엔), 회의비용(2만150엔), 사회민주당 공헌비(5만엔) 등 총 63만엔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사회민주당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기에 이 청원서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정치자금 조달이 광범위하게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또 이러한 방식으로 이익을 얻은 자산가들이 정치자금을 제공했을 것이다. 새롭게 수립되는 정부의 재정과 재건에 필요한 자산들은 이렇게 정치자금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불법 정치자금의 부담은 모두 일반 국민들에게 전가되었다. 국민들은 그만큼 비싼 가격에 물품을 사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국민들이 봉이었다.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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