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1 (화)

[매경이 만난 사람] 취임 100일 맞은 최정표 KDI 원장 단독 인터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본격적인 재벌 논란을 불러온 저서 '재벌, 성장의 주역인가 탐욕의 화신인가'가 출간된 지 27년이 흘렀다. 공저자로 참여했던 최정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이 책의 출간 이후 재벌개혁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30대 젊은 교수가 한국을 대표하는 국책연구기관 수장이 되는 동안 재벌개혁 논의 양상도 상전벽해의 변화를 거쳤다. 최 원장이 대선공약 작성에 참여한 문재인정부는 공정거래위원회 주도로 경제민주화 정책을 거침없이 진행해오고 있다. 여당의 지방선거 압승 이후에는 재벌 지배구조 개편을 위한 상법·공정거래법 개정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의 경영환경 악화, 외국자본에 의한 한국 경제 잠식 우려도 덩달아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재벌개혁론의 선구자가 이끌 KDI는 어떤 모습일지에 세간의 이목이 쏠리는 가운데 매일경제신문은 지난 4일 최 원장 취임 100일 기념 단독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전공 분야인 경제민주화와 함께 오늘날 한국 경제에 던져진 다양한 숙제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고, KDI의 향후 50년간 청사진을 마련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최 원장과의 인터뷰는 서울 중구 매경미디어센터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 사회의 재벌개혁 작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하나.

▷재벌개혁의 핵심인 지배구조 개편은 사실 시작도 못한 셈이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 갑질 제재 등 공정위에서 주로 수행하는 작업은 '행태 규제'에 해당한다. 제재한다고 해도 지배구조를 해결하지는 못 하고, 그마저 기업이 소송을 제기하면 공정위가 패소하는 경우도 많다. 경제력 집중을 해소하고, 경영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법·공정거래법의 개정(집중투표제 의무화,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등)이 필요하지만 전부 국회에 묶여 있다. 행태 규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같은 구조적 접근이 필요하다.

―순환출자 해소, 지주회사 전환 등은 구조개편으로 평가할 수 있지 않나.

▷지주회사 제도가 마치 재벌 지배구조의 해법처럼 통용되는데, 실상은 재벌에 힘을 집중시키는 제도다. 미국에서처럼 지주회사가 자회사 지분을 100% 보유해야 하는 제도·문화가 갖춰진다면 모르겠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지주회사 제도는 재벌이 적은 자본으로 큰 기업을 소유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구조적 개편이 완성되면 재벌은 어떤 지배구조를 갖게 되나.

▷서구권 기업들처럼 오너 3·4세들이 자연스럽게 경영에서 손을 떼고,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전문경영인 체제가 갖춰져야 한다. 미국도 100년 전에는 록펠러, 포드 등 재벌 기업이 즐비했다. 그러나 기업이 커질수록 오너 일가의 지분 비중이 줄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넘어가게 됐다. 상속세가 철저히 부과되고, 경영이 투명하니 후손들도 굳이 경영을 맡을 필요성을 못 느꼈다. 대신 전문경영인에게 맡겨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기업이 장기 투자전략을 수립할 때는 책임감을 가진 오너가 경영하는 것이 낫지 않나.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일본을 보면 장기 투자전략을 통해 고도성장을 이끈 것은 전문경영인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군에 의해 일본의 재벌이 강제 퇴진됐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후 일본이 주권을 되찾으며 전문경영인들만 복권돼 오늘날 일본의 전문경영인 체제가 자리 잡았다. 이들이 기업을 이끌기 시작하며 일본은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능력 있는 경영자들이 활약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준 일본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한국에는 성공적인 오너 경영인이 많은데.

▷이병철·정주영 같은 이들은 전문경영인으로 봐야 한다. 경영능력이 특출한 사람들이었고, 미국·일본의 전문경영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장기투자에 따른 위험도 기꺼이 감수하려 했다. 이들처럼 기업을 설립한 초창기 오너들은 모두 전문경영인들이다. 미국의 존 록펠러도 전문경영인으로서 스탠더드오일을 설립하고 수완을 발휘해 미국 석유사업을 독점하게 됐다. 이건희 회장은 오너 2세이지만 경영능력이 뛰어났던 인물로, 록펠러 1·2세가 모두 훌륭한 경영인이었던 것과 유사하게 볼 수 있다.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재벌개혁 이슈가 제기되면서 재벌을 국민기업화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정부가 경영에 간섭하는 것은 재벌 기업만도 못한 지배구조다. 대기업 지배구조의 순위를 3순위까지 매기자면 전문경영인 기업이 제일 좋고, 그다음이 재벌, 가장 안 좋은 것은 공기업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포스코와 KT처럼 민영화된 기업의 경영이 정치인 입김에 휘둘리는 독특한 지배구조가 나타났는데, 이는 가장 안 좋은 지배구조라 할 수 있다. 재벌 기업은 오너 일가가 경영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지만, 정부에 휘둘리는 기업은 정권이 바뀌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민영화된 공기업 일부에서 이 같은 행태가 이어져왔는데, 근로자와 소비자, 공급 업체가 스스로 나서서 정치인 개입을 차단하고 회사를 지켜야 한다.

―이전 정부의 재벌 지배구조 개혁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개인적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배구조를 개편할 동력을 갖고 있던 지도자로 꼽는다. 둘 다 보수 대통령으로서 확고한 지지기반을 가져 경제민주주의를 실현할 힘을 갖췄었다. 김 전 대통령은 실제로 재벌개혁을 시도했지만 당시 재벌들이 단체로 투자, 고용을 줄이며 경기가 얼어붙자 먼저 화해를 제의하고 말았다. 박 전 대통령은 경제민주화를 선거구호로만 활용했을 뿐 당선된 후 재벌과 영합해버렸다.

―현 정부가 펼치는 소득주도 성장정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저소득층의 한계소비성향이 높기 때문에 그들의 가처분소득을 증가시키면 소비가 활성화돼 경기 선순환을 불러온다는 것이 소득주도 성장 이론이다. 그동안 정부·기업 투자 위주 정책의 한계를 보고 소득주도 성장을 택한 것은 잘했다고 본다. 그러나 최저임금 인상이 소득주도 성장을 대표하는 것처럼 논의가 진행되는 점은 우려된다. 최저임금은 수혜 계층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해주는 것일 뿐 소득주도 성장에서 차지하는 지분은 1% 정도나 될까 싶다. 근로장려세제(EITC)를 비롯한 다른 복지정책들이 진정한 소득주도 성장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소득주도 성장정책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만큼 아직 성패를 논하기는 이른 시점이라고 본다. 지난 1분기 소득 하위 20% 가구의 소득이 크게 감소했던 것에 대한 평가도 연말까지는 기다려봐야 한다. 출범 1년밖에 안 된 문재인정부 정책의 결과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주52시간 근로제로 인해 어려움을 호소하는 기업이 많은데.

▷법을 처음 시행하면 지키는 사람도 나오고, 그러지 않는 사람도 나온다. 주5일 근무제를 처음 도입할 때도 토요일까지 일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바꿔야 할 조항이 발견되면 바꿔주고, 융통성 있게 조정하는 기간도 둘 필요가 있다.

―최저임금과 52시간 근무 이슈가 불거지면서 노동조합들이 비정규직을 비롯한 취약계층 노동자들 이익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는데.

▷노조가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동조합으로부터 소외 받는 노동자들이 문제가 되는데, 이런 90%의 조직화되지 않은 노동자들은 국가가 해결책을 모색해 줘야 한다.

―각종 기득권으로 인해 규제 혁신이 지지부진한데 해법이 있을까.

▷법·규정을 바꿔 일거에 규제를 없애려는 방식은 상당히 어렵다. 대신 규제를 특정 사안별로 풀어주는 규제 샌드박스(신제품의 규제를 일정 기간 풀어주는 제도), 규제 신문고(규제개선 건의 창구) 등을 활성화해야 한다. 이렇게 일시적으로 풀리는 사례가 쌓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규제 자체를 없애는 논의도 일게 될 것이다.

설립 50주년 앞둔 KDI, 예타조사 등 사업보다 연구기능 더 충실할 것

매일경제

―경기 둔화 전망이 늘고 있는데.

▷우리 경제는 안 나빴던 적이 없다. 미국의 금리 인상, 미국과 중국의 무역마찰 등 도전과제가 놓여 있다고 하지만, 도전과제는 항상 존재해 왔다. 결국 수출을 늘려 대응하는 수밖에 없는데 우리 경제의 50년 역사를 보면 늘 도전이 있었던 것처럼 특수도 있었다. 과거 '월남특수'가 있었고, 이어 국제유가가 오르며 '중동특수'가 나타났다. 중동특수가 꺼진 후에는 중국이 개혁개방에 나서며 '중국특수'를 누릴 수 있었다. 이제 중국특수가 꺼져가는데, '북한특수'가 뒤따를 것이다. 새로운 남북관계가 열리면 북한을 넘어 북방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특수여서 잘 준비하면 우리에게 더 큰 기회가 열린다. 이 같은 기회를 잡기 위해 KDI도 관련 부서를 확장시키고, 북한을 포함시킨 국가개발 전략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그래도 당장은 경기 하강 우려감이 크다.

▷과거에 10%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때의 향수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장률은 2.5~3.0% 정도면 적당하다고 본다. 이제는 경기활성화에 치중하기보다 분배구조를 개선하고 복지를 증진해야 한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50년 전에 쓰던 정책을 계속 쓰면 안 된다. 50년 유지된 우리 경제체제를 50년 된 집에 비유하자면, 고치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 도배만 깨끗이 하고 말지, 아니면 부엌 등 인테리어를 뜯어고치는 구조개편을 할지 중에 선택하는 것이다. 이전 정부들은 도배하는 수준이었다면 이번 정부는 구조를 바꾸려 하고 있다.

―향후 KDI 운영 계획은.

▷KDI는 한국의 경제개발 기간 지대한 공헌을 한 덕에 외국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소로 평가받아 왔다. 이제는 KDI가 과거처럼 독보적인 연구기관이 아니란 것을 인식하고 새로운 역할을 찾아야 할 시점이다. 2021년이면 KDI가 설립 50주년을 맞는데, 새로운 50년을 바라볼 수 있는 비전과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예비타당성조사, 경제교육을 비롯한 사업 업무 비중이 커졌는데 본연의 기능인 연구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훌륭한 연구인력 확보에도 힘쓸 것이다.

최정표 원장은…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진주고 졸업 △성균관대 경제학과 졸업 △뉴욕주립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박사 △미국 워싱턴&제퍼슨대 경제학과 조교수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독일 호엔하임대 경제학과 객원교수 △일본 도쿄대 경제학부 객원교수 △한국산업조직학회 회장 △건국대 상경대학장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대담 = 정혁훈 경제부장 / 정리 = 문재용 기자 / 사진 = 김재훈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