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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이게 판화? 말이 막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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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미술관 ‘한국현대판화 60년’전

말 형태에 잉크 대신 피와 씨앗 넣어 자라게 하는 등 실험성 깃든 다양한 작품 전시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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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솜을 가득 채운 투명 플라스틱 상자에 녹색 말 두 마리 이미지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서니 그 이미지는 무 새싹으로 채워져 있다. “이게 판화인가요?” 지난 3일 경기도미술관 ‘판화하다-한국현대판화 60년’전 프리뷰 때 작품을 보던 누군가가 묻는다. “판화를 설치미술과 융합한 거죠. 스텐실 원리로 (말) 형태를 만들어 그 안에 씨앗이 자라게 하는 겁니다. 작가는 물감이 아니라 피와 씨앗을 넣은 거죠.” 신장식(한국현대판화가협회장·국민대 교수)이 권순왕의 ‘자라나는 이미지-말’(2016)에 관해 설명한다.

신장식은 지난 4월 남북정상회담 때 판문점 평화의집 2층 회담장에 걸린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으로 화제가 된 작가다. 목판화 ‘아리랑-기원’(1991)을 이번 전시에 출품한 그가 설명을 이어갔다. “스텐실은 잉크가 지나면 (형태가) 찍히는데, 이건 (잉크가 묻을 자리에) 풀이 자라는 거죠. 판화 개념이 들어간 겁니다. 우리 눈에 (형태가) 찍히잖아요.”

권순왕은 이 작품에서 ‘개념판화’를 지향했다. 동물 이미지에 씨앗을 뿌리고 흙으로 덮은 뒤 혈액을 공급한다. 과정 자체가 미술 작업이다. 시간이 지나 새싹이 더 자라면 동물 이미지는 변하면서 결국 사라진다. 고정되지 않은 이미지를 시각화하려는 시도다. “식물은 동물의 피를 만들고, 피는 순환하여 식물을 만든다”(권순왕)는 생태 순환 주제를 넣은 작품이다.

전시는 한국 현대판화 60년을 돌아본다. 한국판화협회가 결성된 1958년을 기점으로 삼았다. 전시는 한국현대판화가협회 창립 50주년도 기념한다. 김정자, 박영근, 신장식, 윤명로, 이성구, 이항성, 한운성 등 120명 160점이 나왔다. 강민지(큐레이터)는 “연대순이 아니라 작품과 판재 사이에 존재하는 찍는 행위와 과정에 초점을 맞춰 5개의 소주제로 각 섹션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바로 ‘각인하다’ ‘부식하다’ ‘그리다’ ‘투과하다’ ‘실험하다’이다.

권순왕의 ‘자라나는 이미지-말’은 판에 구멍을 내거나 섬유 텍스처 사이로 잉크를 투과시켜 찍는 방식(스텐실, 세리그래프, 실크스크린 등)을 소개하는 ‘투과하다’ 섹션에 들어갔는데, 정통 판화의 개념을 해체·확장하는 ‘실험하다’ 섹션에 넣어도 무방한 작품이다. ‘실험하다’ 섹션엔 조각의 주조 기법을 이용한 캐스팅이나 판화의 평면성을 극복한 혼합기법 설치 등 2000년대 이후 한국 현대판화의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는 여러 작품이 출품됐다. 내용은 추상과 구상이 어우러지고, 형식은 설치와 디지털을 아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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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국립현대미술관 ‘한국현대판화 1958~2008’전을 잇는다. 최은주(현 경기도미술관장)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으로 일할 때 ‘50년’전을 열었다. 최은주는 “2000년대 중반만 해도 대중성도 큰 영향력을 가진 매체였는데, 지금 한국 판화는 많이 위축됐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판화의 정신과 기법이 살아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지난 10년간 나온 실험적 작품을 많이 전시했다”고 말했다. 팔만대장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판화’는 전통의 매체이면서 개념미술이나 컴퓨터와도 결합·융합하는 첨단의 매체다. 이번 전시는 동시대 첨단 매체라는 점을 부각하려고 최근작을 많이 냈다. 10년 전 전시 때 나온 백남준, 김구림, 이우환, 오윤 등 유명 작가 작품이 빠진 이유도 여기 있다.

‘그리다’ 섹션엔 평면 위에 직접 드로잉해 찍은 작품을 소개한다. 구리나 아연판에 날카로운 도구로 이미지를 새긴 후 화학적 상실의 과정을 거치는 작품들은 ‘부식하다’ 섹션에 넣었다. ‘각인하다’ 섹션을 빼놓을 수 없다. 판화의 가장 원초적 기법은 바로 판을 깎는 행위다. 1950년대 후반 한국 현대판화의 태동부터 1980년대 민중판화의 부흥까지 ‘각인’의 목판화가 한국 현대판화의 중심이었다. 단순하고 대담하며 노동 집약적인 목판화 작품들이 이 섹션에 들어갔다.

신장식은 노동의 과정을 중시한다. 그는 “판화라는 미디어가 컴퓨터 등과 융합하면서 새로운 양상이 지금 벌어진다”면서도 “결국 모든 예술은 사람 손으로 이뤄진다. 판화엔 손맛이 들어가야 한다. 예술의 본연과 근원이 그 안에 숨어 있다”고 했다. 그는 상업화랑이 오프셋 인쇄물에 작가 사인을 해서 파는 세태도 비판했다. “그건 가짜죠. 그건 아닙니다.” 신장식은 이번 전시에 ‘금강산’ 목판을 하나 기증했다. 체험비 5000원을 내면 금강산 판화를 체험하고, 소장할 수 있다.

판화는 단순해 보이면서 복잡하고 어려운 매체다. 목판화·메조틴트·애쿼틴트·리소그래피·세리그래피 등 기법은 다양하다. 미술관은 관람객 이해를 돕기 위해 홍윤(목판화), 김흥식(동판화), 남천우(리소그래피), 나광호(세리그래피)의 작업 과정을 상영한다. 전시는 9월9일까지.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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