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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위안부 통역사 김희애 “혼자 잘산 게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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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개봉 영화 ‘허스토리’ 주연 일본 정부 상대 위안부 소송 다뤄 ‘할머니들의 입’ 여행사 대표 맡아 머리 짧게 자르고 체중 10㎏ 불려 “불우한 시대의 인간승리 와닿아”

중앙일보

실화가 소재인 영화 ‘허스토리’의 주인공 문정숙(김희애 분). 화통한 성격의 여행사 사장인 그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위안부·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일에 나선다. [사진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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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를 본래 모습으로 돌리도! 열일곱 살, 그때로 돌리도!”

‘부산 할매’들의 응어리진 외침이 일본 법정을 흔들었다. 위안부 강제 동원 증거를 요구하는 일본 정부엔 세월도 덮지 못한 흉터투성이 몸을 내보였다. 부산지역 여행사 사장(김희애 분)이 일본어 통역을, 재일동포 변호사(김준한 분)가 무료 변론을 하며 함께 싸웠다.

이는 27일 개봉하는 ‘허스토리’(감독 민규동) 한 장면. 부산의 백발 성성한 위안부 및 정신대 피해자들이 1992년부터 6년간 우리 정부 도움 없이 일본 정부의 사죄를 요구하며 손해배상을 청구, 소송을 일부 승소로 이끌었던 ‘관부재판’ 실화를 다룬 영화다. ‘관부’는 재판이 열린 일본 시모노세키(下關·하관)와 부산을 아우르는 말. 재판을 위해 할머니들은 50여 년 전 일본군에 연행되며 거쳤던 시모노세키를 다시 찾았다. 역사를 바로잡으러 나선 자칭 국가대표 선수였다. 일부나마 보상판결을 받아낸 건 일본 정부에 맞선 위안부 법정투쟁 중 최초였다.

개봉에 앞서 만난 주연배우 김희애(51)는 “불우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남은 할머니들의 당당한 인간승리가 와 닿았다”면서 “극 중 택시운전사에게 ‘저분이 당신 어머니면 어떻겠냐’고 소리 지르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저부터도 너무 먼 나라 얘기처럼 생각했던 게 굉장히 부끄럽고, 영화 출연하면서 접할 수 있었던 게 늦게나마 다행이었다”고 했다.

‘허스토리’에는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그리고 박정자까지 한국영화론 보기 드물게 60, 70대 베테랑 여성 배우가 함께 뭉쳤다. 이들이 연기한 할머니들의 과거 증언 장면은 각각이 한편의 모노드라마 같다. 그만큼 흡인력이 세다. 뇌매독을 앓는 아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살아온 배정길(김해숙 분), 거칠지만 솔직한 박순녀(예수정 분) 등 역사적 비극의 상징이 아니라 현실에 살아 숨 쉬는 할머니들 저마다의 목소리를 또렷이 스크린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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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배우 김희애, ‘허스토리’에서 그가 연기한 인물 ‘문정숙’의 모델이 된 김문숙 한국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회장, 배우 김해숙, 민규동 감독.


여기에 김희애가 연기한 문정숙의 성장 스토리가 더해진다. 극 중 문정숙은 부산에서 여행사를 하는 화통한 싱글맘. 지역 여성들을 돕다가, 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를 처음 증언한 걸 계기로 자신의 여행사에 위안부 신고센터를 연다. 할머니들을 가까이 알수록 “혼자서만 잘 먹고 잘산 게 부끄러워” 일본 정부에 사죄받는 일에 전 재산을 바치게 된다. 여전히 한국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를 이끌고 있는 올해 91세의 실존인물 김문숙 회장을 모델로 했다.

우아함을 벗어던진 김희애의 연기는 시원시원하게 극을 견인한다. “실존 인물의 이야기라서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는데 촬영을 시작하고 나니까 굉장히 부담스러운 숙제였어요. 가짜처럼 보이면 작품에 누가 된단 각오로 머리도 커트하고 체중도 10㎏ 가까이 찌웠어요. 평소 성량으론 문정숙 캐릭터에 턱도 없어 좀 더, 좀 더 끌어올렸죠. 부산 사투리, 일본어는 석 달 가까이 달달 외웠어요. 감독님이 소문난 완벽주의자인데 촬영 중에 대사를 조금씩 바꾸셔서 좀 벅찼죠.”

큰 도전이었던 재판장면을 모두 끝내던 날엔 분장실에서 주체 못 할 눈물이 흘렀다고 했다. “그간 쌓인 속앓이가 북받치며 되게 시원하고, 허탈하고…. 제 나이에 그런 중압감을 이겨내고 뭔가 해낸 다음 울 수 있다는 게 행운이었죠. 여러 선배 배우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더 귀했어요. 바꿀 수 없는 시간 속에 숙성된 연기 장인이잖아요. 막 담근 술같이 새것만 찾는 세상에서 나이가 많다고, 여자란 이유로 상대적으로 기회가 적다는 게 아쉽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작품이 계속됐으면 좋겠어요.”

“이겨야 할매들 분이 안 풀리겠느냐”고 흥분하는 문정숙을 침착하게 보좌하며 깊은 속내를 드러내는 재일동포 변호사 역은 ‘박열’(2017)의 일본인 예심판사 역으로 주목받은 신예 김준한이 맡아 호연을 펼친다. 후반부로 갈수록 문정숙의 딸(이설 분), 여행사 직원(이유영 분) 등으로 뻗어 나가는 여성들의 이해와 연대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제복 입은 일본 경찰만 봐도 몸이 벌벌 떨리던 할머니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단단히 버틴다.

이들과 함께 재판에 나서진 않았지만 묵직하게 다뤄지는 또 다른 할머니(박정자 분)도 있다. 자신도 위안부였지만 나중엔 포주 역할을 했던 그의 말 못한 사연에선 세상이 규정한 피해자의 틀을 넘어 힘겨운 세월을 헤쳐 온 개개인에 귀 기울인 영화의 사려 깊은 태도가 드러난다.

‘허스토리(Herstory)’는 여성을 주체로 한 역사란 뜻.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2011) ‘내 아내의 모든 것’(2012) 등 장르를 넘나들며 여성 주인공을 다뤄온 민규동 감독은 “할머니들을 위안부 이전에 여성으로 바라볼 때 이해의 폭이 깊어졌다”고 돌이켰다. 스물한 살 영화학도 시절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증언을 들었다는 그는 이후 “가슴에 바윗덩어리를 안고 살았다”고 했다. 10년 전부터 위안부 할머니들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자 수차례 시도했지만 힘들고 불편한 소재란 인식 속에 좌절하던 때, 관부재판 기록을 접했다. 그는 “잊혀있던 작은 승리의 흔적에서 커다란 의지의 서사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고 말했다.

재판에 참여한 마지막 원고 이순덕 할머니가 지난해 4월 세상을 떠났다.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는 현재 28명뿐. 여전히 뜨거운 그녀들의 용기에 도리어 힘을 얻고 나올 영화다. 관람 시 손수건은 필수.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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