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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정적도 대통령 만든 킹메이커… 좌우 넘나든 정치 ‘풍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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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2인자’로 불린 JP / 박정희와 5·16쿠데타로 정권 창출 / YS·DJ와 차례로 손잡고 대권 도움 / 신군부 등장에 정치권 퇴출 수모도 / 13대 총선으로 화려하게 정계 복귀 / 내각제 위해 1990년 3당 합 당 결행 / DJ와 헌정사상 최초 공동정부 구성 / 40여년간 총리 2차례·9선 국회의원 / 2004년 10선 도전 실패에 정계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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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부녀와 기념촬영 1979년 5·16 민족상 시상식을 마친 뒤 박정희·박근혜 전 대통령과 기념촬영한 사진.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 23일 세상을 떠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우리 정치사에 큰 영향을 끼친 거목이었다.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함께 40여년간 한국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DJ, YS에 이은 JP의 타계로 ‘3김 시대’의 주역은 이제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JP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35세에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정계 입문 후 국무총리 2차례, 국회의원 9선, 당 총재 3차례(민주공화당, 신민주공화당, 자유민주연합)에다 집권당인 민주공화당 당의장과 민주자유당 대표 등을 역임하는 등 이력이 화려하다. 그가 남긴 ‘자의 반 타의 반’ ‘상선여수(上善如水)’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다’는 어록에선 정치판에서의 ‘JP 처세술’을 읽을 수 있다. ‘영원한 2인자’ ‘풍운아’ 등으로 불린 것도 그의 정치 스타일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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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 국교정상화 주역 1962년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을 벌이고 있다.




JP의 손을 거쳐야 대통령직에 오를 수 있다고 할 만큼 그의 존재감은 컸다. 그는 처삼촌인 박 전 대통령과는 5·16 쿠데타를 함께한 동지로서, 참모로서 역할을 했다. 3김 시대를 열었던 YS, DJ와는 각각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과 DJP(김대중-김종필) 연대를 통해 정권을 창출하는 등 한국 정치사에서 좌우를 넘나들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선배 군인을 축출한 JP는 약 20년 뒤 거꾸로 당한다. 1980년 신군부 등장 후 후배 군인에게서 정치권에서 강제로 퇴출당하는 수모를 겪는 등 영욕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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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답변하는 국무총리 1972년 국무총리 시절 국회 대정부 질문에 답변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려 야인 신분으로 미국에 체류하다가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에 앞서 귀국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대선 후보로 출마했다.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 YS, DJ와 대선에서 겨뤄 4위에 그친 JP는 대통령 도전에 역부족을 느끼고 내각제로 돌아섰다.

이듬해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원내 의석 35석을 확보한 JP는 여소야대 4당 체제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등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런 그는 1990년 노태우 대통령, YS와 함께 3당을 합당해 민자당을 만들었다. 이들은 합당 후 내각제를 추진한다는 합의문을 문서로 약정까지 했으나 YS의 반대로 합의문은 휴지 조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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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공직 물러난 JP 1968년 ‘국민복지회’ 사건으로 모든 공직에서 퇴임한 뒤 신당동 자택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


14대 대선에서 집권한 YS의 민주계는 1994년 ‘세계화’를 명분으로 내세워 민자당 대표 JP를 퇴물이라며 쫓아내려고 했다. 이에 반발한 JP는 예상을 뒤엎고 일흔 나이에 탈당해 자민련을 창당했다. JP는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광역단체장 15곳 가운데 충청권 3곳과 강원도지사까지 4곳을 얻어 건재함을 과시했다. 다음해 실시된 15대 총선에선 원내 의석 50석을 확보해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JP는 여세를 몰아 1997년 15대 대선에서 내각제를 공약으로 DJ와 연대해 승리함으로써 DJ와 공동정부를 헌정사상 처음 출범시켰다. 그는 공동정부에서 총리를 맡아 명실공히 국정의 2인자 역할을 했으나 DJ와 대북정책을 놓고 끊임없는 마찰을 빚었다. 결국 2001년 국회에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 가결을 계기로 DJ와 갈라섰다. JP는 2004년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후보로 10선에 도전해 실패하자 현실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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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15분 별세하면서 한국 현대정치사를 지배했던 ‘3김(金) 시대’의 주역들이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다. 사진은 1988년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만난 3김. 왼쪽부터 당시 김종필 공화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연합뉴스 자료사진


JP는 오랜 정치를 하며 YS, DJ와 달리 ‘승부욕’이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권력 앞에서 무리수를 두지 않아 정상에 오르는 데 2%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는 내각제 신봉자였다. 그러나 내각제 관철을 위해 정치생명을 걸지 않았다. 권력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는 모습으로 일관했다. 대나무 대신 수양버들을 택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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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는 또 양김과 달리 ‘계보’ 관리를 하지 않았던 게 특징이다. ‘들어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게 JP의 정치스타일이다.

영욕의 삶처럼 그에 대한 공과는 산업화를 이끈 주역이라는 긍정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지역주의에 의존해 정치생명을 연장했다는 부정이 엇갈린다.

황용호 선임기자 drag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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