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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장석주의 사물극장] [51] 에릭 사티의 '펠트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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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몽마르트르의 카바레 '흑묘(黑猫)'에서 피아노를 치고, 봉두난발에 펠트 모자를 즐겨 쓰고 자신을 '가난씨(Mousieur le Pauvre)'라고 불렀다. 32세부터 죽을 때까지 27년 동안 피아노 한 대와 쓰레기가 뒤범벅된 파리 교외의 아파트에서 아내도 아이도 없이 가난과 고립을 벗 삼아 살았다. 바로 현대음악가 에릭 사티(1866~1925)의 얘기다.

사티는 25세 때 작가 겸 점성가인 조세핀 펠라당이 만든 '미학적 장미 십자단'에 들어갔다. 평생 예술과 신비를 통해 미(美)를 따르겠다는 서약을 해야만 회원이 될 수 있는 단체다. 사티는 잡지에 공개 서한을 보낸 뒤 1년 만에 펠라당 무리와 결별했다. 32세 때부터 '차가운 작품들' '배[梨] 모양을 한 세 개의 소품' '한 마리 개를 위한 물렁물렁한 진짜 전주곡' 등 익살스러운 제목의 피아노곡을 잇달아 써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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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는 타자기나 사이렌 소리 같은 기계적인 음향과 리듬에 영감을 받아 새로운 곡을 써내면서 악보에는 음악 기호 대신에 '이가 아픈 꾀꼬리같이'라든가, '놀라움을 지니고'라고 적었다. 장 콕토와 만든 '발레극'을 1917년 파리의 샤틀레 극장에서 공연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공연은 야유와 욕설이 난무하는 등 소동을 빚었다. 사티는 기소되어 '8일간의 금고와 100프랑의 벌금형'을 받았다.

사티는 교향악단의 연주 무대에 뛰어들어 주먹다짐을 벌이고, '예술원' 공모에서 낙방하자 소동을 벌였다. 한때 피카소, 장 콕토, 드뷔시, 르네 클레르 같은 예술가와 교류하고 트리스탕 차라 등과 '다다 운동'을 했다. 사티는 신을 '무능하고 어리석은 노인'이라고 맹비난하며 제 아파트를 영지(領地)로 삼아 고독한 군주로 살았다.

이 괴팍한 음악가는 음주로 인한 간경화로 성 요셉 병원에 입원했다. 결국 한 달 뒤인 1925년 7월 1일,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티는 대중에게서 야유를 받고 전위음악을 하는 이들에겐 '음악의 신'으로 추앙받았다. '사라방드' '짐노페디' '그노시엔' 등은 전위음악가인 존 케이지 등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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