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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TF인턴수첩] 기자는 '엉덩이 싸움'을 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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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팩트

취재현장엔 언제나 무릎을 꿇고 마이크 또는 노트북을 든 기자들이 '앉아'있다. 사진은 지난 5월 30일 대법원 앞에 모인 KTX 해고승무원 측과 취재진 모습. /임현경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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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미학'이 깃든 취재 현장 체험기

[더팩트ㅣ임현경 인턴기자] '공부는 엉덩이 싸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오래 앉아있는 '근성'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언제나 이런 어른들의 말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근성보다는 동기나 흥미가 더 중요하지 않냐고 받아치면서요.

하지만 인턴기자가 된 지금, 틈만 나면 어딘가에 궁둥이를 붙이고 있는 중입니다. 19일에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복도 어딘가에 주저앉았습니다. 역시, 아무리 까불어도 옛말에 틀린 말이 지독히도 없습니다.

이날 오전 국회에서는 자유한국당 초선 의원들의 비공개 모임이 있었습니다. 비공개 모임인 만큼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언제쯤 회담이 종료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앞서 김성태 대표 권한대행이 '혁신안'을 발표한 시점에서, 이들의 만남은 당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취재진은 회의장 문이 열리기만을 바라보며 막연히 기다려야 했습니다. 일부 의원들이 벌컥 문을 열고 나오자 취재진은 바짝 긴장해서 모임이 끝난 것인지 살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일정이나 휴식 등의 이유로 잠시 장소를 벗어났을 뿐 회의가 종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후에도 몇 차례의 입·퇴장이 있었지만, 모두 허탕이었습니다. 회의장 문고리가 달싹일 때마다 근처 의자, 바닥, 계단에 앉은 이들의 엉덩이가 들썩거렸습니다. 화장실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문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철퍼덕 앉아 녹음기와 카메라 애플리케이션을 점검했습니다. 약간의 움직임이라도 감지되면 언제든 튀어나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죠. 대리석 바닥의 차가운 냉기가 아랫배를 살살 괴롭힐 때쯤 벌떡 일어나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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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는 "기자는 막연한 기다림을 견딜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취재현장에는 늘 무거운 카메라를 지지하는 삼각대와 멀리까지 찍을 수 있게 돕는 사다리가 준비돼있다. 사진은 국회 한 켠에 모아둔 장비 모습. /임현경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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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막연한 기다림을 견딜 줄 알아야 해." 다른 곳에서 기사를 쓰던 선배가 옆에 다가와 앉으며 느긋하게 말했습니다. 취재를 위해선 분명 발로 뛰어야 하지만, 일단 자리를 잡으면 끈질기게 버티는 일이 필요하다고요. 종일이 걸릴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다.

정오가 되자 아침 식사를 거른 위장이 배고프다고 아우성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주전부리라도 사 먹으려면 현장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잠시 한눈판 사이 의원들이 나온다면, 깜짝 놀랄 일이라도 벌어진다면, 그간 기다린 시간이 물거품이 되는 건 물론, 크게 혼날 게 분명했습니다.

'아, 이래서 선배가 늘 주머니에 하루 견과를 넣고 다니라고 했구나.'

회의가 길어지자 슬슬 다음 취재를 위해 떠나야 하는 기자들이 생겼습니다. 같은 언론사의 다른 기자가 그 자리에 앉아 '교대'로 취재를 이어가는 훈훈(?)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마침내 철커덕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의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그들은 "김성원 의원에게 물어보면 잘 대답해줄 것"이라며 바삐 걸음을 옮겼습니다. 어찌나 빠르게 사라지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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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원 의원을 기다린 시간은 3시간이었지만,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은 시간은 4분에 불과했다. 사진은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김 의원과 자리에 남아 기사를 작성하는 취재진. /임현경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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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진을 회의장 안으로 안내한 김성원 의원은 자리에 앉아 초선의원들의 회담 내용을 간략히 전달했습니다. 의원들은 당 개혁과 인적 청산을 위해 깊이 논의했으며 앞선 혁신안의 발표 절차가 아쉽지만, 그 방향에 대해선 대부분 동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어 취재진이 질문을 던졌지만 김 의원은 "다들 점심 식사도 하셔야 하고"라며 일어섰습니다. 김 의원을 기다린 시간은 3시간이었지만,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은 시간은 4분에 불과했습니다. 일 년을 기다려 겨우 하루를 만나는 오작교 위 견우와 직녀가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사실 기다림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턴기자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그간 푹신한 차 뒷좌석부터 햇볕에 뜨겁게 달궈진 땅바닥까지 엉덩이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자리를 잡고 앉아 기다리는 일이 흔한 일과였습니다.

한 번은 무더위에 그늘 하나 없는 법원 정문 앞에 앉아, 근처 카페라도 가 있으라는 주변의 권유를 물리치던 선배 기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 '신입이 아니냐' 물으니 "9년차 기자"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아득히 멀어 보이지도 않는 '대선배'조차 보도블록 위에 앉아 기사의 개요를 잡고 취재 대상을 기다리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평소 짧은 반바지를 좋아하던 저는, 인턴기자가 된 이후 언제나 긴 바지를 입고 출근합니다. 단정한 모습을 위해서라든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어느 바닥에 앉을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벌레가 가득한 흙에, 가끔은 때가 잔뜩 묻은 곳에 앉게 될지도 모릅니다.

빨래가 조금 힘들어지겠지만, '엉덩이 싸움'을 더 잘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현장을 보고 듣고 글에 담아, 좋은 기자가 될 수 있다면 옷쯤이야 얼마든지 더러워져도 괜찮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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