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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한평생 궁중음식 만들면서 평민 일상식도 궁금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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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궁중음식연구원 한복려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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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음식연구원 한복려 원장. 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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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노인’이 많은 시대다. 평균수명 80살이 넘은 2018년 한국인에게 청춘은 20~30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30~40대가 부러워할만큼 활발한 활동으로 ‘제2의 청춘’을 사는 60대도 많다. 하지만 한줄 한줄 늘어나는 나이테가 서글픈 건 어쩔 수 없다. 스스로 살 날보다 산 날이 많다고 느낄 때 우리는 한 번쯤 뒤를 돌아본다. 이만하면 잘 살았는지를 자문한다. 궁중음식연구원 한복려(71) 원장도 그런 이다.

조선시대 궁중음식 연구에 한평생을 바친 황혜성(1920~2006) 선생의 딸로 태어난 그는 운명처럼 그 뒤를 이어왔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는 신선로·석류탕(석류 모양의 만두가 들어가는 음식)을 곁들인 비빔밥 등을 만찬 음식으로 선정해 진두지휘했다. 길러낸 후학도 많다. 그런 그가 최근 무겁고 두꺼운 책 <수라일기>(1·2권)을 펴냈다.

정조 모친 ‘혜경궁 홍씨’ 회갑잔칫상 기록
‘원행을묘정리의궤-권4 찬품편’에 해답
“수행원·군인들 먹은 음식도 적혀 있어”
8일간 315가지 차림중 ‘약과’ 가장 비싸

제자 24명과 1년간 정리 ‘수라일기’ 펴내
"젊은 서양요리 셰프들도 읽어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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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음식연구원에서 지난 2013년 재현한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 상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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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이 넘으니 더 나이들어 분별력이 없어지기 전에 뭔가 근사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조선시대 왕실 기록인 <원행을묘정리의궤>(1795년)에 주목했다. 정조가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화성행궁에서 마련한 8일간의 잔치를 기록한 것이다.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이 국가의 중요한 행사 때마다 그 전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하게 한 자료다.

한 원장은 그동안 궁중음식을 연구하면서 재현도 하고 각종 행사도 열었지만, 더 깊은 내용의 기록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상궁이나 평민의 일상식이 궁금했는데, 자세한 기록을 찾기 힘들더군요. <조선왕조실록>에도 별로 없어요.”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권4 찬품편’이 그에게 답을 찾아줬다. ‘권4 찬품편’에는 8일간 진찬상, 수라상, 반가상, 미음상 등 혜경궁 홍씨가 받은 60여 차례 밥상을 포함해 수행원이나 군인, 평민 수천명이 먹은 음식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다. 재료와 분량도 촘촘하게 적혀 있다.

지난해 2월부터, 한 원장은 24명의 궁중음식 이수자들과 함께 ‘권4 찬품편’에 기록된 315개의 음식을 쉬운 한글로 옮기고, <뎡니의궤>와 <진연의궤> 등 고문헌을 참고해 현대식 ‘레시피’로 정리했다. 그 내용을 모아 <수라일기>로 펴낸 것이다. 223년 전 밥상이 2018년의 언어로 옷을 갈아입고 세상에 등장했다. 지난 4월 궁중음식문화재단 설립에 맞춰 출간기념회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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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1일 서울 원서동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선보인 궁중음식문화재단 출범 기념 떡 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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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개량하기가 가장 어려웠다”는 그는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당시와 근접하게 정리했다”고 한다.

<수라일기>엔 당시 다양한 계층의 일상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단초들이 있다. 군인과 평민은 국밥 형태의 음식을 많이 먹었다. 여기에 침채(김치)와 반찬 한두 가지가 추가됐다. 밥 대신 떡과 대구포를 먹기도 했고, 하사한 돈을 들고 화성 인근 주막에 가 밥을 사 먹기도 했다. 잔칫상에 가장 많이 사용된 식재료는 소·돼지·꿩·닭 등 고기류였는데 내장까지 아낌없이 먹어, 버린 것이 없었다고 한다. 재료의 신선도를 특히 따져 부위별 조리 시각도 달랐다. 상하기 쉬운 명태알로는 오전에 어장탕을 끓여 먹었다면 오후엔 살짝 말린 명태를 구워 상에 냈다.

흥미로운 건, 잔칫상에 오른 음식마다 비용이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단품으로 가장 비싼 음식은 고기도, 해삼도 아닌 약과였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10만원인 30냥이 들었다고 한다. 절육(황대구·건대구·홍어·광어·문어·전복 등 11가지의 말린 고기와 생선을 쌓아 올린 음식)도 같은 비용이 들었고, 이보다 더 많은 돈이 든 것은 지금 돈으로 350만원어치인 어전유화(여러 가지 생선의 포를 기름에 지진 것)였다.

책엔 정조가 회갑연에 이어 다음 날 연 노인잔치에 대한 기록도 정리돼있다. 15명의 노인 관료, 화성 거주민 384명 등 어르신들을 한 자리에 모아 잔치를 열었다. 99살이 넘은 노인도 3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부드럽게 조리한 두포탕(두부탕), 편육, 흑태증(검정콩 찜) 등이 상에 올랐다. 정조는 200여년 뒤에 이 땅이 ‘노인의 나라’가 될 줄 알았던 걸까.

여전히 생기 넘치는 한 원장은 “외국에서 공부하고 와 창의적인 음식을 만들려는 셰프들이 많은데, 그들이 이런 기록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면서 “도움이 필요하면 기꺼이 함께하고 싶다”고도 말했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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