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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TOPIC] 주주권 적극 행사 나선 국민연금-오너家 전횡 견제 vs 기업 압박 우려 ‘팽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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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이코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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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유업 갑질, 영국의 옥시 사태.

기업들의 부적절한 경영 행태가 도마 위에 오를 때마다 이들 주식을 보유하고 있던 국민연금을 향해 적극적으로 주주권 행사에 나서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국민연금은 무대응 내지 소극적 주주활동으로 일관해왔을 뿐이다.

국민연금이 달라졌다. 최근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는 ‘갑질’ 논란으로 물의를 빚은 대한항공에 경영진과 사외이사 비공개 면담을 요청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국민연금 측이 투자 기업에 경영 개선 대책을 직접 요구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행보다. 국민연금의 행보를 바라보는 시각도 엇갈린다. 이제라도 주요 주주로서 경영진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주주권 행사에 나서는 것은 맞는 방향이라는 시각이 있는 반면, 독립성을 담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정치적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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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커진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는 글로벌 트렌드

지난 6월 5일 보건복지부의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는 “한진그룹 경영진 일가의 일탈 행위 의혹이 국민연금의 장기 수익성을 저해할 가능성이 있다”며 “한진그룹 측에 경영관리 체계 개선 등을 포함해 효과적인 대책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은 한진그룹 지주사인 한진칼과 대한항공 지분을 각각 11.81%와 12.45% 보유한 2대 주주다. 기존 국민연금의 소극적인 주주활동에 비춰볼 때 국민연금이 대한항공에 공개서한을 발송하고 경영진 면담을 결정한 것은 적극적 주주활동의 신호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번 국민연금의 행보를 바라보는 시선은 극명히 갈린다. 일단 재계는 속내가 복잡하다. 국민연금은 지난 3월 말 기준 국내 주식시장에 약 131조원을 투자하고 있다.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국내 기업만 267곳에 이른다. 재계에서는 대한항공에 대한 주주권 행사를 신호탄으로 국민연금이 투자 기업에 대한 경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수순을 밟지 않겠느냐고 우려한다.

당장 오는 7월 도입이 예정된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더욱 손쉽게 해준다는 점에서 재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이번 한진그룹 등에 대한 주주권 행사는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능후 장관이 주주권 행사를 기금운용위원회 위원들에게 제안하고 위원들이 이에 동의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되면 이런 절차 없이 실무진 차원에서 수시로 이뤄질 수 있다.

지난 5월 말 국민연금이 고려대로부터 제출받은 스튜어드십 코드 연구용역보고서는 ‘경영 참여에 해당하는 주주활동을 할 필요가 있다면 보유 목적을 단순 보유에서 경영 참여로 변경신고한 뒤 관련 주주권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면서 국민연금이 사외이사나 감사 후보를 추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물론 경영 참여로 전환할 경우 단기매매차익을 반환해야 하는 등 여러 제약이 뒤따라 실제 이행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관측도 있다. 국민연금 입장에서도 사외이사나 감사 추천은 연금 사회주의 논란을 확산시킬 수 있어 부담스러운 선택지다.

의결권을 행사할 의결권전문위원회의 임명자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고 위원들의 전문성이 부족한 것도 재계는 우려한다. 특히 스튜어드십 코드 시행을 앞두고 보건복지부가 지난 3월 16일 기금운용위원회를 열고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의결권 전문위)에 ‘안건 부의 요구권’을 부여하는 내용의 의결권행사 지침 개정안을 의결하면서 전문위의 권한은 더욱 막강해졌다. 개정된 지침에 따르면 앞으로 9명의 의결권행사전문위원 중 3명 이상이 요구하면 기금운용본부는 해당 안건의 의결권 결정을 전문위에 넘겨야 한다.

반면, 이 같은 재계 우려가 편향됐다며 반발하는 시각도 만만찮다.

이미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는 글로벌 연기금의 투자 트렌드로 자리 잡은 지 오래라는 반론이다. 선진국 연기금은 투자 기업의 가치와 자산가치를 올려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글로벌 5대 연기금 중 네덜란드공적연금(ABP), 노르웨이국부펀드(GPFG), 미국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calPERS·캘퍼스),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 4곳은 주주가치를 높이고자 주주소송과 입법운동, 투자자 연대에 나서기도 한다. ABP, GPFG, CPPIB 등 3곳은 사외이사 추천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며 투자 대상 기업의 경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특히 캘퍼스는 투자 기업 중 문제 기업의 목록을 ‘포커스 리스트(Focus List)’로 작성해 공개도 한다. 기업의 지배구조에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실적이 나쁜 기업의 리스트를 작성해 시장에 공개함으로써 공개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ABP 역시 기업 경영진과의 대화 등을 통해 기업들이 노동 환경을 개선하거나 사회책임활동에 나서도록 독려해 기업가치를 높이고 있다.

▶독립성 확보 시급

▷금통위 모델 참고할 만

다수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이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에 나서는 것과 함께 독립성 확보를 위한 지배구조 개선 작업에도 속도를 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국민연금 최고 상위 기구인 기금운용위만 봐도 정치적 입김이 차단된 상태에서 의사결정이 이뤄진다고 보기 힘들다. 기금운용위원장은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며 소속 위원만 20명에 달하지만 복지부 장관(위원장)과 기획재정부 차관,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등 당연직으로 정부 관계자 6명이 참여한다. 사용자(3명)·근로자(3명)·지역 가입자(6명)·전문가(2명) 대표 등 14명은 본업을 따로 가진 채 위촉위원으로 활동한다. 구성이 이렇다 보니 실질적인 의사결정은 복지부 공무원 주도로 이뤄질 때가 많다.

결국 해법은 국민연금 지배구조 개혁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금융투자 전문가들도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결코 아니다. 투명한 의사결정구조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정부에 떠밀리듯 주주권 행사에 나서는 것이 문제라는 게 다수 전문가들 시각이다.

조명현 한국기업지배구조원장은 “정부가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을 통해 민간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연금 사회주의’ 논란을 벗으려면 자본시장법이나 대통령령 개정을 통해 국민연금이 위탁운용사에 의결권을 위임해 행사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된다”고 제안했다.

송민경 기업지배구조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민연금이 기금자산 가치가 훼손되는데도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것은 국민의 노후자산을 운용하는 자의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다. 현재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를 수탁자책임위원회로 확대 개편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재계, 노동계, 정부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추천한 전문가가 포진한다면 관치 우려를 덜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주장했다.

지난 2009~2013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지낸 전광우 전(前) 이사장은 국민연금의 독립성·전문성 제고를 위한 벤치마크 모델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를 꼽았다. 금융통화위원회는 당연직인 한국은행 총재·부총재를 제외하면 기획재정부 장관·한국은행 총재·금융위원장·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행연합회장이 각각 전문성 있는 인사를 추천한다. 그는 “현재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는 보건복지부 장관, 여러 부처의 차관, 노동자·사용자 대표 등 20명으로 구성돼 기금 운용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고 논의 효율성도 떨어진다”며 “기금운용위원회는 장기적 관점에서 채권, 주식, 대체 투자 등 자산 배분과 이에 따른 리스크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논의하는 자리여야 하지 특정 기업을 겨냥하는 자리여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준희 기자 bjh0413@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63호 (2018.06.20~06.2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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