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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젊은 신참 개의 하극상으로 어수선했던 산막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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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5)
이른 새벽 새소리에 깨어 밝아오는 아침을 맞는다. 산막을 지키는 개들과 함께 맞는 아침이다. 들리느니 계곡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뿐. 모든 것이 그대로 자연이라 장엄하고 늘 지키지 못하는 산막인지라 애잔하다. 개들과 지낸 십수 년. 그동안 거쳐 간 녀석들만 수십 마리. 대풍이, 기백이, 금순이, 해랑이, 대백이, 순돌이, 곰곰이, 은순이, 샌드…. 이름도 다양하고 생긴 것도 다양하고 성격도 다양하다.

그 모두 사랑 주고 사랑받아 단 한 녀석도 범상하지 않았다. 뜬금없이 웬 개냐고 의아해할 줄 모르지만 나는 왠지 이 아이들 이야기를 하고 싶다. 체면치레, 가식 속에서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며 아옹다옹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보다야 훨씬 더 건강하고 진지하며 솔직하다.

늙는 것이 안쓰러운 산막의 대장개
중앙일보

산막을 지키는 대백이, 곰곰이, 기백이. [사진 권대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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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백이가 산막에 온 것은 초여름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2003년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이곳 산막의 터줏대감이요, 나와 같이 생활한 지 13년이 넘은 혈통 좋고 잘 생기고 영민하고 점잖은 개다. 수많은 개가 이곳을 거쳐 갔지만 나와 가장 정이 많이 들었다. 당연히 산막의 대장개로 그 권위를 넘볼 사람도, 개도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세월인지라 어느새 노쇠현상이 오는가 싶더니 다리가 구부정해지고, 눈도 침침해지고, 가끔 집도 나가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늙는 걸 어느 누가 막으랴만 볼 때마다 안쓰러웠다. 개가 없는 산막은 생각할 수도 없고 대백이 이후를 생각해 어린 개 한 놈을 구하려고 수소문했다. 마침 앞 동네에 사는 6달 난 진돗개 수놈 하나를 주인한테 이야기하고 데려와 기백이라 이름 지었다.

대백이와 곰곰이, 새로 온 기백이까지 세 마리 개의 공동생활이 시작됐다. 당연히 처음에는 어린 기백이가 서열 세 번째로 질서가 잘 유지되는 듯했다. 개의 본성으로 수놈은 수놈을 경계하는 법이지만, 워낙 어리고 작은 놈이라 혹여 대백이가 으르릉거리는 시늉만 해도 발라당 배를 뒤집고 항복하니 별일 있을 것도 없었다. 이렇듯 평화로운 나날들이 지나갔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요 녀석이 겁도 없이 대백이에게 대드는 기색이었다.

내가 일주일 만에 산막에 들어서자 세 녀석이 모두 함께 반기며 난리를 치는 가운데 까부는 기백이를 대백이가 점잖게 나무라는 듯했다. 그런데 요 녀석이 전과는 달리 으르릉거리며 반항하는 것이 아닌가.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지기에 걱정은 하면서도 특별한 방도도 없고 말로만 타이르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뿔싸 며칠 전 밤에 드디어 사달이 나고 말았다.

대장개에 대드는 젊은 개 기백이
그날 밤이 이슥해 남은 밥과 국을 먹이게 되었고 마침 양이 많지 않아 따로 주지 못했다. 내가 옆에서 지키며 한 놈씩 먹여주면서 대백에게 남은 밥그릇을 밀어 넣는 순간 기백이가 같이 먹으려고 했다. 이 꼴 보지 못한 대백이가 공격하고 그래서 둘이 싸우기 시작했는데, 어찌나 격렬한지 도저히 말릴 수 없었다.

깜깜한 야밤인 데다 한데 엉겨 싸우니 싸우는 소리, 낑낑대는 소리, 헉헉대는 소리만 들릴 뿐 어딘지 조차 짐작할 수 없다. 급히 불 밝히고 살펴보니 저 아래 밭두렁에서 한 덩어리로 엉겨 누가 누군지도 잘 분간이 가지 않는다. 잘 못 하면 큰 사고 나겠다 싶어 몽둥이를 들고 간신히 두 놈을 떼어놓았는데, 모두 피투성이가 돼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기백이는 귀가 물려 피가 철철 나고 대백이는 다리를 물려 절뚝거리고 헉헉거리며 힘에 겨워 일어나지도 못한다. 억지로 일으켜 세워 집으로 데려오니 젊은 녀석을 당하지 못한 울분을 삭이지 못한 채 처량한 몰골로 꼬리를 내리고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반면 기백이는 젊은 놈인지라 피가 나든 말든 의기양양해 펄펄 뛰고 대백이 있던 자리를 떡 차지했다. 곰곰이는 옆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다. 가관인 것은 암놈 곰곰이가 하는 짓이다. 명색이 제 아비요, 신랑이기도 하던 대백이 안위는 아랑곳없고 기백이와 희희낙락해 목불인견이 따로 없었다. 아무리 개라 하더라도 그렇지 혈육지정, 부부지정이 있는데 저럴 수가 있나 싶다. 착잡하다.

중앙일보

내 마음 속 영원한 대장, 대백이의 모습. [사진 권대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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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에게 인의예지를 가르칠 수 없는 노릇이다. 욱일승천하는 젊은 기세를 몸도 성찮고 나이든 늙은 놈이 어찌 감당하겠나 생각하니 마치 우리네 처지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 아 어쩐단 말이냐? 매일 산막에 있기라도 하면 같은 편이 돼 지켜라도 줄 텐데. 한 놈을 우리에라도 가두면 어떨까 싶지만 한겨울 혹한에 물도 어는 상황을 고려하면 그럴 수도 없고.

무엇보다 걱정되는 건 자존심 상한 대백이가 ‘에잇 더러운 세상’ 하며 집이라도 나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다. 모르겠다. 대백이의 선택지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냥 더럽더라도 인내하며 대장 자리를 기백에게 물려주고 살아가던지, 아니면 절치부심 재도전해 확실하게 뭔가를 보여주던지, 그도 저도 아니면 그냥 집 나가 새 삶을 찾던지. 그 어느 선택도 최선은 아니라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일손이 잘 잡히지 않았다.

패전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대장개
산막 모퉁이를 돌아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대백이를 보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아 대백이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죽은 자식이 돌아온 것처럼 반가워 살펴보니 큰 이상은 없는 듯하다. 기백이가 달려드니 으르릉거리며 경계하는 모습도 여전하고. 아하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구나. 오늘 계속 지켜보고 나름 늙은 놈의 권위를 세울 방법을 찾아야겠다. 마침 다가오는 기백이를 잡아놓고 콧잔등을 때리며 일장훈계를 했다.

“네 이놈! 대백이가 늙고 힘없다 해도 내겐 아직 대장이다. 그러니 너도 경로심을 발휘해 잘 모시도록 해라.” 곁에서 얼쩡거리며 기 살아 꼬리 흔드는 대백에게도 일렀다. “너도 이제 권위의식 버리고 화이부동의 정신으로 인정할 건 인정하고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도록 해라. 늙는 게 죄는 아니니 마음 편하게 가져라.“

산막에 평화만 있는 건 아니다. 개에게서도 인생을 배운다. 옆에서 지켜보던 곡우가 한마디 한다. “자연의 법칙인데 무얼 그래요.” 헐 늙으면 서러운 게 많다.

권대욱 아코르 앰배서더 코리아 사장 totwkwon@ambat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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