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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절대 포기 마세요" 말기암 극복, 크라우드펀딩 나선 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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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지난 14일 서울 종로에서 만난 이정훈씨. 여성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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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대 암환자는 젊기 때문에 잘 견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아요. 하지만 젊음의 한가운데서 암을 맞는 이들의 박탈감이 더 클 수도 있어요. 죽음을 가깝게 생각하지 않을 나이니까."

지난 14일 점심시간, 직장인들이 밀집한 서울 종로에서 만난 이정훈(37)씨는 이렇게 말했다. 여행과 운동을 좋아하는 평범한 직장인에서 하루아침에 말기암 환자로, 기적처럼 다시 일상으로 들어온 그는 "암 투병을 한 나도 일상으로 돌아온 게 보통 일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2015년 7월 대기업에서 사내벤처 관련 업무를 하던 이씨는 위염 증상을 느꼈다. 바쁜 업무로 미뤄둔 종합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의사에게서 "심상치 않다"는 말을 들었다. 조직 검사 끝에 버킷림프종 혈액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두 달 전 마라톤을 뛸 정도로 건강했기에 충격은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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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암 투병 시절의 이정훈씨. [사진 이정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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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암 말기는 생존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듣고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머리는 빠지고 몸무게는 줄었다. 74㎏이던 몸무게는 50㎏이 됐다. 매일 아침 세수하기 위해 거울을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는 "이대로 죽긴 억울해 그저 버텼다"고 회상했다. 증상이 조금씩 나아지자 그는 여행을 가고 싶었다. 병상에서 버킷리스트를 만들었고 2015년말 퇴원 직후 제주도 등 국내에서 시작해 버킷리스트를 실행에 옮겼다. 2016년 말에는 다니던 회사에 복직했다. 2017년 1월부터는 80일 동안 미국 등 북미와 남미, 유럽 등을 다녀왔다.

이씨는 자신의 암 투병 경험을 환자들과 나누고 싶었다. 죽음 앞에서 포기하지 않았던, 여행을 꿈꾸며 살아낸 스스로가 작은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었다.

"투병할 당시 친구나 동료들은 제가 누워만 있으니까 책을 선물해줬어요. 하지만 읽을 수가 없어요. 항암치료를 하면 집중하기 어렵고, 글자를 보면 메스껍고 어지러웠어요."

그는 당시의 경험을 되살려 투병 중인 젊은 암환자들을 위한 여행 포토북 제작에 나섰다. 가고 싶은 곳을 향한 열망을 가졌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2016년 11월부터 지인들을 비롯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사람들을 모았다. 한 달에 두 번씩 정기 모임을 했다. 교사, 약사, 목사, 보험설계사, 대학생 등 14명이 모였다. 암을 극복해낸 이도 있다. 암 환자들을 위한 활동을 고민하고 모색했다. 이렇게 '또봄'(당신을 또봅니다)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또봄’은 당신의 건강했던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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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봄 프로젝트 모임. 이들은 매달 두 번씩 정기적으로 모인다. [사진 이정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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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부터 이들이 직접 제작한 포토북의 크라우드 펀딩이 시작된다. 사진은 이씨가 미국, 남미, 동남아 등 여행지를 다니며 찍었고, 14명의 팀원들이 함께 디자인, 편집 등을 맡아 제작에 참여했다. 이씨가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진행하는 포토북 판매 크라우드 펀딩에는 가수 울랄라세션도 함께 참여한다. 울랄라세션은 일부 포토북에 사인을 하고 2030 암환우들을 응원하는 메시지를 전할 예정이다.

이씨는 암환자들과 커뮤니케이션도 적극적이다. 투병자들에게는 기꺼이 ‘고통의 선배’가 된다. 끝까지 의지를 잃지 말자고 독려한다. 여행을 가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는 무리한 여행을 권유하지 않는다. 자신의 상태를 판단해보고, 담당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결정하라고 조언한다.

최근에는 암 투병자와 극복자들이 속한 모임들 간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최근 유방암을 극복하신 분들이 모인 모임을 알게 됐어요. 암을 극복한 이들의 경험을 투병하고 있는 이들과 공유해보면 어떨까 생각해 투병자 커뮤니티와 효과적, 지속적으로 연결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경험자들을 통해 암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고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라고 느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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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봄 프로젝트가 제작한 포토북 일부. [사진 이정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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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이씨는 암 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극복하려는 의지'라고 당부했다. "암은 치료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이겨내려는 의지가 없으면 버틸 수 없어요. 극복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나눠 투병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요. 가끔 극복한 분들이 '내가 뭘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하는데,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어요. 또 프로젝트나 재능 기부에 능력을 가진 많은 분들이 동참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씨와 인터뷰를 마치고 아서 프랭크 캐나다 캘거리대 교수가 자신의 암 경험을 기록한 책『아픈 몸을 살다』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인간의 고통은 고통을 함께 나눌 때 견딜 만해진다. 누군가가 우리의 고통을 인정한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고통을 보낼 수 있다. 고통을 알아봐 주면 고통은 줄어든다."

암 환자의 고통을 겪은, 그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씨는 더 많은 이들이 암 환자들의 고통을 알아봐 주길 바랐다.

여성국 기자 yu.sungk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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