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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화)

13년째 다낭 외국어대에 장학금, 베트남 딸도 하나 얻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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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수 세종종합수산 대표
한국일보

박천수 (주)세종종합수산 대표는 13년째 다낭외국어대에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강은주기자 tracy11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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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표의 양녀 후엔(베트남·30)의 결혼식 기념촬영. 한국세종장학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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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딸 둘 덕분에 살맛이 납니다. 로또 당첨된 기분입니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왔는데 삶을 보상받은 기분입니다.”

박천수(54.세종종합수산)대표는 “늦게 얻은 딸 둘 덕분에 살맛이 난다”고 했다. 박 씨는 슬하에 아들만 둘이다. 작년에 큰아들이 결혼을 했다. 며느리를 봤다. 집안 분위기가 달라졌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예뻐 죽겠다고 한다.

“경상도 남자 셋은 하루 딱 세 마디만 하고 산다고 하죠. ‘밥 뭇나, 별일 없나,

자라.’ 그게 딱 우리 집이었습니다.”

며느리는 시댁문화에 잘 흡수되어 딸이 되었다. 매일 아침 예쁜 목소리로 안부전화를 한다.

“행복이 이런 거구나, 싶죠, 하하!”

박씨의 또 다른 딸은 베트남 사람이다. 후엔(30). 후엔은 대학 1학년 때부터 박 씨가 지급한 장학금으로 공부했다. 한국을 사랑했고 박 씨를 존경했다. 2014년 한국으로 유학을 왔고 양녀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작년 4월에 결혼을 했다. 알콩달콩 신혼생활중이다. 현재 부산에어 다낭지점 부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사위는 호찌민대학을 졸업한 은행원이다. 후엔은 아버지 박 씨에게 삶의 보람과 행복을 안겨줬다.

후엔과의 인연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에 박씨는 대구시와 자매결연한 다낭시를 방문했다. 생애 첫 외국여행이었다. 당시 베트남은 우리나라 70년대 초반 경제수준과 비슷했다. 어린 시절 박 씨가 자란 환경과 비슷했다. 박씨의 망막에 베트남은 그리움으로 맺혔다. 때 묻지 않은 사람들의 순수함에 마음이 끌렸다. 마침 다낭외국어대학에 한국어학과가 신설된다는 소식을 들었고 장학금 지원을 결심하게 되었다.

“세종대왕을 존경해서 20여 년 전 ‘세종종합수산’으로 법인체를 만들었습니다. 베트남에서 한글을 배우는 한국어학과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 위해 상호를 따서 한국세종장학재단을 설립했습니다. 13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내 생애 가장 보람된 일입니다. 첫 외국여행이 만들어준 운명 같은 인연입니다.”

박 씨는 첫해 한국어학과 학생 12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4년 후 32명으로 학과생이 늘어났다. 전원 장학금을 지원했다. 장학금 덕분인지 한국어학과는 인기학과로 급성장했다. 지원자가 많아 올해부터 두 개 반으로 늘렸다. 경쟁률이 무려 7대 1에 달했다.

박씨는 매년 다낭외국어대학에서 열리는 한글날 행사에 열일을 제쳐두고 참석했다. 총장 인사말 뒤에 늘 박씨의 축사가 이어졌다. 그때 후엔이 통역을 맡았다. 그녀는 한국어가 유창(7등급)했다. 다낭 외국어대학 내에서 전교 5등 안에 들 정도로 똑똑했다. 학생들의 한국사랑은 대단했다. 반별 노래자랑과 뮤지컬도 선보였다. 한국 노래와 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태권도 시범도 있었다. 4시간에 걸친 행사였다. 박 씨는 다낭에 피운 한국어 나무에 비옥한 토양분이 되었다.

“촌놈이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개 같이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말처럼 지난 시간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돌이켜보니 고생이 아니라 행운이었습니다.”

박 씨는 덩치처럼 통이 크다. 학교행사 후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다. 상다리가 휘도록 시켰다. 예의가 아니라면서 학교 측에서 식사비를 지불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대부분 소식(小食)을 한다. 문화적 차이였다. 통 크게 음식을 시킨 자신이 쑥스러워 한바탕 웃었던 기억도 에피소드로 남는다.

베트남 전쟁 때 다낭은 대격전지였다. 한국군인도 참전했다. 전쟁 시 한국군인의 만행도 적잖이 보고되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긍정적이다.

‘한국인을 적대하지는 않느냐’는 물음에 ‘우리는 한국과 싸운 적 없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 싸워서 이겼다’고 말한다.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은 처음으로 외국과의 전쟁에서 패했다. 현재 베트남은 한류열풍을 타고 한국문화와 함께 한국 사람도 좋아한다.

박 씨는 경북 영양 출신이다. 박씨는 3남 1녀 중 막내로 늦둥이였다. 두메산골 가난한 살림살이에 유년시절 고생을 많이 했다. 어린 나이에 서울 도남동시장 계란 도매업에 취직하며 순탄치 않은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부산 동대신동시장 청과물가게서 배달 일을 하며 유통을 배웠다. 군대 제대 후 직장생활은 성에 안 찼다.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89년 결혼과 함께 효목동에서 통닭집을 열었다. 야채 배달차도 하며 투잡을 병행했다.

건강은 타고났다. 열심히 일했다. 2년간 회사월급의 10배의 소득을 올렸다. 자신감이 생겼다. 큰물에서 놀고 싶었다. 당시 튀김 닭은 5,000원이었고 회 한 접시는 30,000원이었다.

1991년 4월 19일 평리5동에서 17평의 작은 횟집을 시작했다. 바다회수산으로 업종전환을 했다. 이곳이 세종종합수산의 첫 단추였다. 용기백배했다. 돈 버는 재미에 지치지도 않았다. 엄청난 부가 따라왔다. 기반을 잡기 시작했다. 진일보해서 활어장사를 시작했다. 활어차를 직접 운전하면 하루 20만 원 이상이 절약되었다.

승승장구하던 박 씨를 하늘이 질투도 했다. 1996년 어느 날 강구 항에 활어를 떼러 갔다가 대형교통사고를 냈다. 평소 박 씨의 성품을 눈여겨보던 동사무소 직원이 있었다. 그의 탄원서 덕분에 17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고마움에 보답을 하고 싶었다. 직원은 복지사각지대에 있는 할머니를 도와줄 것을 권유했다. 그때부터 박씨는 20년 동안 기부와 나눔을 이어갔다. 그동안의 기부내역에 대해서는 손사래를 치며 밝히기를 꺼렸다.

“유년시절 힘들었던 생각이 납니다. 어려운 이웃과 같이 살아가자는 마음뿐입니다.”

2009년 ‘세종종합수산’은 법인설립으로 회사 외형을 갖췄다. 전국에 7개의 대

형 횟집을 운영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박 씨는 타고난 추진력으로 새로운 분야에도 도전했다.

몇 해 전부터 창녕미니복합신도시 근로자주거단지 건설 시행사를 맡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박 씨는 언뜻 보면 형님분위기가 묻어난다. 다시 보면 구수한 인간미가 사람을 끈다. 국물로 치면 진국이다. 요즘 바쁜 와중에 늦깎이 대학생으로 남몰래 공부 중이다. 그는 어느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가난이 싫어서 돈을 벌기 위해 억척같이 일했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달릴 겁니다. 촌놈이다 보니 진실밖에 없지만 무엇보다 인간관계를 소중히 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인연이 맺어졌고요. 요즘 딸들 덕에 살맛도 나고 삶이 환해졌습니다. 앞으로 희망사항은 노인복지재단을 만들어 봉사하는 것입니다.”

강은주 기자 tracy11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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