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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정태명의 사이버 펀치]<67>유행에 편승한 연구는 뿌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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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신문

“20년째 폰트 개발을 하고 있어요.” 미국 시카고 근처 통신연구소에서 반평생을 폰트 연구에 투자한 반백의 연구원 말이 의미심장하다. 폰트 시작과 역사를 모두 간직하고 새로운 폰트 개발에 전력하는 그의 말투가 폰트처럼 보인다. 시시각각 주제를 바꿔야 하는 우리나라 연구 풍토와 비교된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국 이후 갑자기 우리나라에 인공지능(AI) 전문가가 대폭 늘었다. 오히려 오랫동안 AI를 연구해 온 이는 뒷전에 밀리는 기현상도 연출됐다. 비트코인이 시장을 강타한 후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유행처럼 번진 블록체인 기법이 포함되지 않은 연구는 외면당하고 쓸데없이 블록체인을 도입하는 어이없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전문가 시스템으로부터 출발한 AI와 알고리즘 기반 블록체인을 철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자칭 전문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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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과 진화가 연구의 가치를 높인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기초 없는 높은 건물은 곧 무너진다는 평범한 진리도 주목해야 한다. 일시성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미래를 만들기 위해 국가 연구 체계와 환경 구축이 필요하다. 연구 및 개발을 적절히 배합한 포트폴리오를 개발해 정부와 연구계가 공유하고, 흔들림 없이 추진해야 한다. 정권 교체가 연구 분야의 변화를 결정하고, 연구소 수장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현실에서 연구를 논할 수 없다.

연구의 독립성 보장이 우선이다. 유행과 정권의 입맛에 맞게 결정되는 정부 정책을 지양하고 연구원들 스스로 주제를 정해야 한다. 관련 부처가 연구 주제를 정하고 무지한 기획재정부와 국회가 이를 수정하고 결정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 산업계와 연구계가 머리를 맞대고 연구 주제를 설정하면 그 결정이 최종안이 돼야 한다. 실적과 유행이 병합돼 정부가 연구 방향을 설정하는 시대는 이미 지난 지 오래다.

장기 연구 지원을 위해 다양한 연구에 적은 금액을 투자하고, 가능성 있는 연구로 판명되면 점차 연구를 확대하는 '사두용미' 전략을 도입해야 한다. 전문가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엉뚱한 아이디어가 현실화될 수 있는 지름길이다. 비전문가가 예상할 수 있는 연구는 대부분 가치가 낮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High Risk High Return' 과제를 중요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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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유행에 따라 분야를 바꾸는 연구원과 이를 조장하는 환경도 변해야 한다. 학생이 유행 품목에 몰리고 연구원이 인기에 편승되면 토양 조성 없이 씨를 뿌리는 현상이 야기된다. 동일 연구에 평생을 투자하는 전문가가 좋은 토양임은 말할 나위 없다. 한 가지 연구가 끝나기 무섭게 다음 연구를 위해 '연구 개발 공고문'을 들여다보는 연구 책임자는 높은 탑을 쌓기 불가능하다.

연구의 주체는 사람이다. 세대를 이어 연구 노하우가 축적되고 유능한 젊은 과학기술자가 지속 계승하는 연구소 환경을 위해 연구소와 대학 관계를 개선하고, 연구소 인턴제도 및 대학과 공동 연구를 확대해야 한다. 연구소가 일시 허약하다는 이유로 경시하면 과학기술 미래는 불투명하다. 또 독일, 스페인, 미국, 한국 등 다국적 인재가 가득 채우고 있는 연구소를 표본 삼아 내 나라 연구의 개념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성공했다고 평가되는 프라운호퍼 연구소, 카롤린스카 연구소 등 유럽 연구소 모습이다. 연구는 성공의 미래로 가는 유일한 통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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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명 성균관대 소프트웨어학과 교수 tmchung@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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