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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법은 멀고 상사는 가까운데···주 52시간 노동 ‘저녁이 있는 삶’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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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부터 주당 노동시간이 52시간을 넘길 수 없게 된다. 우선 300인 이상의 사업장부터 적용된다. 주당 68시간까지 ‘합법적으로’ 보장받는 것을 넘어 노동자 대표와의 합의만 있으면 사실상 무제한 연장노동이 가능했던 시대도 종지부를 찍는다. 법으로 못박은 노동시간 단축은 많은 변화를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업종별 기업별로 각기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일괄적인 법 적용으로 시행착오를 겪을 소지도 있지만, 무엇보다 장시간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법이 정한 노동시간은 지금이나 7월 이후나 같다. 주 40시간이다. 주5일 근무제 기준 하루 8시간씩 일하는 것이 근로기준법이 정한 노동시간이다. 바뀌는 것은 연장노동을 한 주에 12시간 이상 시킬 수 없게 한 점이다. 올해 7월부터 적용되는 300인 이상 사업장을 비롯해 내년 7월에는 기존 특례업종에서 제외된 업종에, 2020년 1월부터는 50인 이상 사업장에 적용된다. 특례업종을 제외한 5인 이상 모든 사업장에 적용되는 것은 2021년 7월 1일부터다. 당장 7월부터 일하는 시간이 짧아지는 변화가 나타나고, 길어도 3년 뒤면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체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법은 멀고 상사는 가깝다’는 말로 나타나는 현실에선 이런 정시 출·퇴근이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52시간으로 노동시간이 준다는 것은 맡은 업무를 처리할 시간도 줄어든다는 의미다. 같은 일을 처리하려면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의 변화에 순응해 고용을 늘리는 기업도 있지만 고용수준은 유지하면서 법망을 빠져나갈 편법을 찾는 기업도 현실적으로 적잖게 나타날 전망이다. 이 경우 여전히 같은 양의 일을 하면서도 빠른 퇴근을 요구받는 직장인들은 회사 바깥에서도 계속해서 일을 놓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일시적으로 편법을 써서 기존의 장시간 연장노동 관행을 유지하려는 행태도 나타나겠지만 장기적으로 지속되기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은 그만큼 임금도 줄어들지만 그 대신 고용을 늘리는 문제로 확대된다. 장시간 노동과 이를 뒷받침하는 저임금·저생산성 구조를 바탕으로 한 한국 사회의 시대상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문제이므로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기 어렵다는 것이다. 국회 예산정책처의 ‘연장근로시간 제한의 임금 및 고용에 대한 효과 분석’ 보고서를 보면 연장노동시간이 제한되면 적용 대상 노동자들의 주당 노동시간은 평균 48분, 연간으로 보면 41.6시간 줄어든다. 이에 따라 월급은 평균 37만7000원(11.5%) 줄어들 것으로 추정됐다. 반면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시간당 임금은 1.3% 오른다. 그리고 1인당 노동시간 감소를 보완하기 위해 기업이 새로 사람을 뽑는다면 약 16만명의 일자리가 생길 것으로 계산됐다. 비정규직 5만개, 정규직 11만4000개의 일자리가 새로 창출된다.

퇴근 후의 시간이 보장되면 휴식과 여가시간이 늘고 가정이나 공동체에 관심을 가질 여건도 만들어진다. 반면 짧아진 노동시간에 맞춰 기존의 담당업무를 더 효율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압력 또한 커진다. 노동시간을 늘려 낮은 생산성을 벌충해 왔던 문제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길게 보면 업무효율과 실적을 우선하는 직장문화가 자리잡고 대신 감정노동이 필요한 대인관계의 영향은 줄어들 여지도 커진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시간당 노동생산성이 높은 해외의 사업장에서는 근무시간 안에는 일에만 집중하도록 강제하는 문화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며 “한국은 단순히 노동시간이 길다는 것뿐 아니라 조직과 일상생활에서 강한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한 복잡한 권력관계 때문에 조직 구성원의 피로도가 더 높아지는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노동시간이 짧아지면 사회 곳곳에서 변화가 나타나지만 분야별 시간차는 존재한다. 일관된 생산라인을 갖춰 근무환경이 비슷한 제조업 분야의 대규모 공장에서는 노동시간을 한 번에 일사불란하게 바꾸기가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반면 프로젝트 단위로 일을 수행하는 방송·광고 등의 콘텐츠업계나 IT업계 등은 평상시 노동시간의 변동이 큰 데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역할이 큰 산업이기도 해 노동시간 조정이 쉽지 않다. 부작용은 최소화하고 노동시간 단축의 효과는 극대화하려면 더 복잡한 대책이 필요한 것이다. 이들 업종에서의 현재 노동실태와 주 52시간 노동 적용 이후의 변화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퇴근 후 ‘갑’의 요구 외면할 수 있을까··‘을의 대표’ 홍보업계의 주 52시간 상황

“1년 뒤에는 광고주한테 ‘퇴근했습니다’라는 말을 꺼낼 수 있으려나?” 김모씨(34)는 ‘을’의 자리에서 일하는 대표적 직종인 광고 기획자다. 퇴근시간을 한참 넘긴 한밤중이라도 광고주가 수정이 필요하다고 전화하면 그때부터 근무시간은 다시 시작된다. 불필요한 내용 수정이 없게 막는 것도, 막지 못해서 광고주의 요구대로 시안을 변경하는 것도 모두 일이다. 언제나 마감시한은 촉박하기 때문에 밤을 새우기 일쑤고 규정대로의 노동시간은 지켜지지 않는다. 이런 업무환경의 특성상 광고업계도 근로기준법 개정 전까지는 특례업종에 포함돼 사실상 제한 없이 노동시간을 늘려왔다. 그러나 특례업종에서 제외되면서 광고업계 역시 내년 7월부터는 노동시간이 주당 52시간을 넘길 수 없다. 광고 기획자 김씨는 “물론 그대로 지켜지기 힘든 현실이라는 건 알지만 1년이라는 유예기간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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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특례업종에 포함돼 있다가 제외된 업종은 1년의 유예기간을 적용받기 때문에 광고업계에도 당장의 변화는 없다. 하지만 김씨는 변화의 방향이 궁금하다. 김씨가 다니는 곳은 중견 대행사 중 한 곳이다. 더 어수선한 쪽은 올 7월 시작될 노동시간 단축을 코앞에 둔 광고주 회사의 마케팅 담당자들이다. “광고주 쪽 분들과는 달리 우리는 아직 앞으로 1년 동안은 무한정 야근할 수 있으니 지금처럼 아무때고 편히 연락하라고 농담처럼 말하죠.” 김씨는 갑을관계가 달라지지 않는 한 불규칙한 노동시간이 달라지기는 어려운 면도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기대하는 구석은 있다. “그나마 ‘갑’들이 퇴근을 일찍 하면 업무 외 시간에 연락하는 빈도는 좀 줄어들지 않을까요.”

재벌그룹의 ‘인하우스’ 광고대행사들이 업계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광고업계는 표면적으로만 보면 출퇴근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며 최대한 야근과 장시간 노동의 폐해를 줄이려 애쓰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광고업계의 대명사 격인 제일기획은 유예기간 1년을 적용하지 않고 바로 올해 7월부터 노동시간 단축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나올 정도다. 하지만 같은 회사 안에서도 팀마다 사정이 다르듯 업계 선두기업의 방침이 다른 기업들에도 파급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현직 광고업계 종사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노동시간 단축의 걸림돌은 인력 확충이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광고 계약이 6개월이나 1년 단위로 진행되고 기간 만료 후 다시 따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대다수의 업체에서 당장 일손이 모자라도 버티고 보자는 식으로 인력 확보에 미온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업종인 홍보업계 역시 마찬가지다. 광고업계와는 달리 300인 이상 기업이면 바로 올 7월부터 주당 최장 노동시간이 52시간으로 제한되는 홍보분야 종사자들 가운데는 이미 하루 8시간 근무를 가정한 업무환경을 경험하는 경우도 있다. 한 대기업의 언론홍보 담당자인 신모씨는 “우리 회사는 출·퇴근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탄력근무제를 하고 있어서 출근시간을 늦추고 퇴근시간을 7시로, 그리고 언론홍보나 대관팀은 저녁 약속을 7시부터 잡는 식으로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신씨의 회사에서는 아직 홍보업무상 필요한 외부 약속을 근무시간으로 인정할지 여부가 확정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보도내용이 퇴근시간 무렵 알려지면 불가피하게 야근할 수밖에 없는 일의 특성을 강조하며 회사와 논의 중이지만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것이다.

결국 홍보업계 역시 주 52시간 노동을 시행하려면 인력 확충이 시급하지만 사내·외의 여건들 때문에 사측이 미온적으로 나온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이른 아침 언론의 조간 보도를 검토하며 업무를 시작하고 저녁 늦게까지 언론이나 외부기관을 대응하며 퇴근이 늦춰지는 점을 감안하면 매주 노동시간은 52시간을 꽉 채울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른 시급한 업무가 없으면 정시퇴근이 가능한 부서에 비해 직원들의 선호도까지 떨어지는 이중고까지 겪고 있다. 그래도 52시간이라는 제한이 생긴 것 자체는 업계 상당수의 종사자들에겐 반가운 일이다. 신씨는 “(주 52시간 노동이) 회사에서 더 오래 일 시키면서 붙잡아두는 문제에도 도움이 되지만, 술자리가 길어지는 외부 약속을 짧게 끊고 나설 때에도 핑곗거리가 생긴다는 점이 좋은 점”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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