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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강천석 칼럼] 한국 信用·대통령 이미지 크게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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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北정상회담 징검다리만 놓고 패싱 당한 한국

독불장군 트럼프 氣싸움으로 김정은 누르고 다시 판 主導하려는 듯

조선일보

강천석 논설고문


트럼프 대통령이 다음 달 12일로 잡힌 미·북 정상회담을 돌연 취소했다. 한국은 언론 보도를 통해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최근 당신들 성명에 나타난 극도의 분노와 적대감을 보면 현시점에서 회담을 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느낀다’ 했다. 펜스 부통령과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을 ‘정치적으로 아둔한 얼뜨기’ ‘사이비(似而非) 우국지사’라고 공격한 일을 가리킨다. 북한은 ‘대한민국 최고 존엄(尊嚴)’에 대해 시도 때도 없이 온갖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퍼부어왔다. 이런 북한 행태에 길들여진 체질이라서 ‘무슨 그만한 일로…’ 하는 생각이 드는지도 모른다.

트럼프 대통령은 거래의 달인(達人)이다. 회담장에서 의자를 걷어차고 나오기보다 회담장에 들어가지 않는 게 낫다. 상황이 그런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회담 제의는 자기들이 먼저 해놓고 회담에 응하느냐 마느냐 선심(善心)쓰는 듯 하는 북한에 끌려 다닐 수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북한의 험한 입은 방아쇠가 됐을지언정 과녁이 아니다. 과녁은 변색(變色)돼가는 김정은의 '완전한 비핵화' 개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 특사를 통해 '완전한 비핵화 용의(用意)'와 '미·북 정상회담 제안'을 전해 듣고 덥석 물었다.

그 와중에서도 거래의 달인답게 보험(保險)에 드는 절차는 빠뜨리지 않았다.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고 한국 특사가 백악관 기자들 앞에서 김정은의 생각과 제안을 설명토록 했다. 한국에 정식으로 중개인(仲介人) 역할을 맡긴 셈이다. 중개인은 '정확한 판단'과 '정직한 전달'의 의무가 있다. 트럼프의 위험(risk) 분산 방식을 한국은 배려(配慮)로 받아들였다.

김정은이 한국 대통령 특사에게 '완전한 비핵화 용의'를 처음 꺼냈을 때 본심(本心)이 무엇이었는지 불분명하다. '완전한 비핵화'와 '체제 유지 보장'은 김정은-시진핑(習近平) 간 북·중 1차 정상회담을 거치며 '단계적-동시적'이란 형태로 결합됐다. 미국은 중국 등장에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미·북 정상회담 카드를 내치진 않았다.

'단계적'과 '동시적'이란 단어는 상호 모순 관계다. 비핵화가 최단 시간(最短時間)에 이행되면 두 단어의 의미 차이가 거의 사라지지만 비핵화 과정이 장기화될수록 의미 차이는 벌어진다. 이 벌어진 간격 사이에서 체제 보장·제재 완화·경제 지원은 챙기면서 비핵화 약속을 저버리는'먹튀 현상'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미국은 북·중 2차 정상회담 이후 이런 위험을 확인한 듯하다. 속마음을 숨기는 시진핑을 포커페이스(pokerface)라는 말로 꼬집기도 했다. 거래의 달인은 여기서 핸들을 크게 꺾었다.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가운데 문재인-김정은 도보 다리 산책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말하는 문 대통령, 듣는 김 위원장 모두 진지했다. 문 대통령은 두 가지를 얘기했을 것이다. 하나는 완전한 비핵화의 필요성이라는 본질 문제다. 다른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하는 방법에 관한 기술적 조언(助言)이다.

정상회담 취소 후 '상부(上部)의 위임에 따라' 발표된 북한 담화문에는 문 대통령의 설득 흔적이 남아 있다. '상부'는 김정은을 가리킨다. 담화문은 '과거 어느 미국 대통령도 내리지 못한 수뇌(首腦) 상봉의 용단을 내린 트럼프 대통령'을 여러 차례 칭송했다. 그러면서도 '첫술에 배부를 리 없겠지만 한 가지씩이라도 단계별로 해결해 나간다면 관계가 지금보다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하는 '기술적 조언'은 받아들이면서도 완전한 비핵화라는 '본질 문제'에 대한 입장은 바꾸지 않았다.

미·북 정상회담의 문(門)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김정은) 생각이 바뀌면 주저하지 말고 전화나 편지를 달라'고 했다. 북한은 '아무 때나 어떤 방식으로나 미국과 마주 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용의가 있다'고 답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취소된 회담이 되살아나는 쪽으로 다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북한 태도 변화를 '좋은 소식'이라고 반겼다.

한국만 회담 중개인으로서 ‘정확한 판단’과 ‘정직한 전달’ 의무를 다했는가라는 의심을 받게 됐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고 한다. 그러나 두 상대에게 각기 다른 말을 전해 붙인 흥정이 깨지는 건 시간문제다. 미국과 북한이 누가 먼저 회담을 요청했느냐를 놓고 벌인 말싸움도 그 뒤탈이다. 정직한 사람이라는 대통령의 이미지가 크게 손상(損傷)됐다. 북한을 바꾸는 일은 고장 난 시계 고치기와 같다. 시계를 멈추지 않고는 시계를 고칠 도리가 없다. 우리는 이번에도 그런 진실과 부딪치고 있다.

[강천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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