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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세상사는 이야기] 우리도 낼 수 있는 망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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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정치적 이해가 갈리는 사람들이야 별별 말을 다 하지만 국민 모두가 설렘으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즈음 남북, 미·북 대화를 지켜보고 있다. 통일이야 다음다음이고 이어져야 할, 토막 난 것들이 우선 눈앞에 선연했다. "열차가 달리면…"이라는 가정에 실리는 온갖 소망들. "죽기 전에 고향 땅을 밟아 보겠나…." 그 한 서린 조심스러운 기대에서부터 평양냉면이나마 먹겠다는 보통 사람들의 들뜸, "기차 타고 파리 가자"는 무심하던 젊은 층의 대담함까지 - 열차가 달리면, 달려갈 마음부터 앞선다. 끊겨 얼어붙었던 나라에서는 마주 앉은 두 정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토록 설?다.

분단 65년. 동족상잔 이후 여태껏 철통인 경계에다 그래도 이리저리 틈을 조금 만들었다가는 또 막히고 다시 만들었다가 또 막히고 그러면서 여기까지 왔다. 바늘구멍도 없던 시절, 이 아득한 작은 분단국에서 독일문학을 전공하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오래 생각했었다. 독일 분단문학이 결론이었지만, 독일 분단문학을 공부하자면 동독문학을 빼고 할 수가 없는데, 그때는 사회주의국가로부터 나온 모든 책은 금서였던 시절이라 그 공부를 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할 것 같아, 서독에서 출간된 동독문학 책들만 어렵사리 구해서 한 권 한 권 번역까지 해가며 읽고, 끝낸 번역은 서랍에 넣어두던 시절의 막막함이 새롭다. 그 관심은 물론, 잘려나간 우리의 절반에 대한 관심이었고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심성에 다가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해빙기가 오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그 한 해 동안 서랍 속 번역이 한꺼번에 다섯 권이나 책이 되는 일도 있었고 그사이 모인 글이 두꺼운 연구서가 되기도 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는 무너진 장벽 뒤의 나라, 동독을 돌아보는 일은, 저절로 또 한 권의 책이 써지고 여러 권이 뒤따랐을 만큼 각별했다.

그 이후 통일을 다져가던 시기의 독일을 정밀하게 살피며 무엇보다 국민의 인내 덕분에 엄청난 국력의 신장이 이루어지는 것을 그야말로 목격할 수 있었다. 벌써 30년 가깝도록 통일세를 매달 꼬박꼬박(수입의 5.5%) 물고 있는 독일 국민들에 대한 감탄도 컸고 머릿속과 마음속의 장벽마저 지워 가려는 묵묵한 사람들의 노력도 놀라웠다. 소수의 극우파가 준동하면 그 앞에 나서서 조용히 견제하는 시민들이 늘 있었다. 혹자는 통일의 문제점을 논하기도 하지만, 통일 이후 유럽 중심국으로 우뚝 선 그 결실은 부러울 뿐이다.

이제 우리의 장벽에도 믿기 어렵도록 다시 틈이 나는 걸 보며 감회와 기대가 컸건만, 지금은 국제 난기류로 하루아침에 다시 뒤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쉬울 리 없어도, 난관이 한두 번 있으랴마는, 그러나 결코 다시는 닫히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 다행히도 이 문제에 정부가 주력하고 있는 만큼 추진되는 일들을 모두가 한마음으로 지켜보고 지원하다 보면 길은 찾아지고 말 것이다. 정부만의 일이겠는가. 무엇보다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만나고 그 마음을 헤아릴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 누구도 투기꾼의 눈이나 밝혀서는 안 된다. 모두가 오로지 성심과 인내심을 더더욱 모아야 한다.

베를린에 울려 퍼지던 망치 소리가 다시 귀에 쟁쟁하다. 매일 장벽 주변을, 브란덴부르크 문으로부터 동서 분단의 한 접점이던 체크포인트 찰리까지 걸었다. 장벽의 동쪽으로부터만 사람들이 몰려 나온 것이 아니고 서쪽 사람들도 장벽 쪽으로 몰려 갔다. 여러 달 동안, 사람들은 삼삼오오 망치를 들고 와서, 망치가 없는 사람은 노점에서 망치를 사서, 그 엄청나게 높고 두꺼운 콘크리트 벽을 자신들 손으로 깼다. 어렵사리 한 조각을 깨면 전리품처럼 기뻐하며 들고 가고, 깨진 조각을 비싸게 파는 노점들도 많았다. 깨기 어려운 그 콘크리트 벽 어딘가에 어느 날은 마침내 구멍이 나 동베를린이 보이고, 어느 날은 그 구멍이 커져서 아이들이 들어가고 또 어른들이 드나들었다.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망치 소리가, 거기서는 너무도 수많아서, 교향악을 이루고 말았다. 장벽 주변에 교향악으로 울려 퍼지던 그 망치 소리를 언젠가 내 나라에 꼭 전하고 싶었다.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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