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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매경데스크] 평판 앞에 힘 못쓰는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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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평판은 중간 계층의 관심사라고 했다. 샐리 메리 뉴욕대 교수가 그리스 촌락을 연구한 결과가 그랬다. 가진 게 없는 하위 계층은 잃을 게 없다. 평판이 좋든 나쁘든 개의치 않는다. 상위 계층은 잃을 게 많은 대신 권력을 갖고 있다. 평판이 나빠져도 권력을 지렛대로 손해를 막는다. 과거 재벌 3세들이 폭행죄를 짓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도 권력 덕분이다. 그러나 중간 계층은 다르다. 권력이 부족하다. 가진 걸 지키려면 타인의 협력이 필요하다. 평판이 악화되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남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렇기에 중간 계층은 평판에 민감해진다.

데이비드 데스티노 노스이스턴대 교수는 "신뢰는 장단기 이익 균형의 문제"라고 했다. 장기 이익이 침해되지 않을 거 같으면 타인의 신뢰를 배신해 당장의 이익을 취하는 게 보통 인간의 심리라고 했다. 상위 계층과 권력자들이 곧잘 타인의 신뢰를 배신하는 것도 그래서라고 했다. 데스티노는 보스로 승진하면 사람이 변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보스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 부하 직원에게 '갑질'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비서에게 자신의 대변이 든 봉투를 건네며 병원에 갖다주라고 지시한다. 이 보스는 비서의 신뢰를 배신했지만, 비서는 그에게 어떤 보복도 할 수 없다. 비서에게 보스는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심리학에서는 상위 계층이 덜 윤리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많다. 심리학자 폴 피프의 연구팀이 횡단보도 앞에서 관찰했더니 고급차 운전자일수록 교통법규를 더 많이 어겼다. 가장 저렴한 차를 모는 운전자는 법 위반율이 거의 0%였으나 최고급차 운전자는 45%가량이 법을 어겼다. 심지어 잠깐 보스 역할을 맡기만 해도 남의 돈을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거짓말을 더 잘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권력 부패'에는 과학적 근거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모바일과 SNS가 이 모든 것을 바꿔놓고 있다. 모바일 덕분에 사회의 투명성과 개방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폭언은 SNS를 타고 온 국민에게 퍼졌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몇 번 클릭만 하면 모 언론사가 조현민의 폭언이라고 보도한 음성파일을 찾을 수 있다. 그의 평판은 땅으로 추락했고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한진그룹 오너 딸이라는 신분과 권력으로도 자신의 이익을 지킬 수 없었다.

이젠 최상위 권력 계층에 속해 있다고 해도 평판의 압력을 이겨내기 힘들어졌다. 은밀한 곳에 숨어 부정한 방법으로 눈앞의 이익을 취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돈과 권력을 지렛대로 몇 명의 입을 틀어막아 자신의 장기 이익을 지킬 수 있었던 세상은 끝났다. 10년, 20년 전에 그렇게 입막음했던 악행마저 SNS를 통해 온 국민에게 알려진다. 권력자라고 해도 타인의 신뢰를 배신하면 평판이 악화되고 결국은 손해를 보게 된다. 잃을 게 많은 상위 계층은 과거 어느 때보다 평판에 민감해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유혹에 약한 존재다. 들키지 않을 거 같으면 몇 푼 안되는 유혹에 넘어간다. 평생 쌓은 명예가 무너질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한다. 2009년 영국 하원 의원 스캔들이 대표적인 예다. 하원 의원들이 포르노 영화 시청비, 욕조 뚜껑 교체비용, 쓰레기봉투값, 별장 청소비 등을 국고에서 타갔다는 사실이 들통났다. 의원들은 이 같은 청구 내역이 공개되지 않을 거라고 믿고 그런 짓을 한 것이다. 그러나 한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그 내역이 공개되면서 의원들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120명이 넘는 정치인들이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해야 했다.

앞으로 한국에서는 영국 하원 의원 스캔들 같은 사건이 계속 터져나올 것만 같다. 지금 한국은 은밀하고 폐쇄된 네트워크가 붕괴되고 투명한 사회가 되고 있다. 상위 계층과 권력자들이 이 같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헐값에 자기 평판을 팔아먹는 잘못을 지금도 저지르고 있을 것만 같다. 24일에도 엄청난 재산을 가진 한 재벌 일가가 외국인 가정부 불법 고용 혐의로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김인수 오피니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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