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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단독] 백제 고도에서 웬 청동기시대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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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공산성 부근서 지석묘 5기 발견

천년 뒤 백제 집터 같은 지층서 나와

조성 경위 규명 등 학계 숙제로



한겨레

공주 공산성 성벽 서쪽 바깥의 주차장 예정터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고인돌 유적을 내려다본 모습. 둥그렇게 돌을 쌓은 고인돌 무덤 자리가 여러군데 보인다. 함께 나온 6~7세기 백제 집터보다 1000년 이상 이른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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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백제 왕성터에서 이런 유적이 나왔지?”

현장을 답사한 고고학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 눈앞에 돌무더기(적석)를 봉분처럼 쌓아 올리고 뚜껑돌(개석)을 덮은 남방식 고인돌(지석묘) 5기가 나타났다. 바로 옆에는 구들을 갖춘 백제시대의 집터가 나란히 있었다. 지석묘는 기원전 5세기께 청동기시대의 것이다. 6~7세기께 백제 집터보다 1000년 이상 이른 시기의 유적이다. 놀랍게도 두 유적은 거의 높이차가 없는 사실상 같은 지층에서 나왔다. 이른 시기 유적은 후대 유적보다 지층 아래에 있다는 고고학의 상식을 깨는 발견이었다. 더욱이 이 지석묘는 한반도 남부 영남권과 동부 호남권 일대에서 종종 발견되는 묘역식 고인돌(무덤 주인을 묻은 구덩이 주위를 네모나 원형으로 윤곽을 지은 뒤 그 안에 돌을 쌓아 조성한 형식)과 빼닮았다. 그러니까 백제 고도에서 그보다 1000년 전 고대 남부지역 사람들이 주로 쓰던 고인돌 무덤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다.

이 고인돌들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백제 왕성터로 짐작되는 유적인 충남 공주 금성동 공산성 성벽 바로 옆 경사진 땅속에서 두어달 전 확인됐다. 공주시 쪽이 서쪽 성벽 바깥쪽 땅 1000여평을 답사객 주차장으로 쓰기 위해 지난 2~4월 금강문화유산연구원에 의뢰해 사전 발굴조사를 하다 생각지도 못한 유적을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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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무덤을 확대해 본 모습. 무덤 주인을 묻는 매장 구덩이 주위에 돌무더기를 봉분처럼 쌓아 올린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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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지석묘가 충청권 일대의 호서 지역에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고고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적으로 평가된다. 조사에서 확인된 지석묘들은 주검이 들어간 중심 구덩이 주위에 지름 2.5~5m 정도로 잔돌무더기들을 원형으로 깔고 구덩이 위에 길이 1m 넘는 덮개돌을 덮거나 세워 뒷마무리를 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남부권 일대의 묘역식 지석묘와 겉보기에 비슷하지만, 주위에 돌무더기로 큰 묘역의 윤곽선을 따로 짓지 않고, 대신 무덤 봉토처럼 돌들을 구덩이 주위에 두둑하게 쌓아 조성하는 적석묘 얼개를 띤다는 게 특징이다. 이들 가운데 3기의 고인돌은 같은 돌무더기 속에 서로 잇닿아 있는 ‘연접묘’ 얼개를 보인다는 점도 주목된다. 주변 비탈진 땅에서는 통일신라, 조선시대의 건물터들과 일제강점기 우물터까지 드러나 고대부터 근대기까지 이곳 일대가 주거 공간으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청동기시대 고고학 연구자인 이청규 영남대 교수(문화재위원)는 “비운의 백제 고도로만 알려진 공주의 역사가 실제로는 그보다 1000년 이상 이른 청동기시대까지 올라간다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하는 중요한 발견”이라며 “지석묘가 왜 백제 주거지와 거의 같은 지층에서 발견됐는지는 앞으로 학계가 풀어야 할 의문”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위원회 매장분과는 이와 관련해 이달 초 현지 자문회의를 열어 유적들을 흙을 덮어 복토하는 방식으로 원상보존하되, 그 위에 지석묘와 백제 집터 등을 복원 공개하는 방안을 추진하라고 권고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금강문화유산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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