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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사랑해요 LG' 전세계에 남기고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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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꿈꾸는 LG는 모름지기 세계 초우량을 추구하는 회사입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남이 하지 않는 것에 과감히 도전해서 최고를 성취해 왔던 것이 우리의 전통이었고 저력입니다." (1995년 2월 회장 취임사)

조선비즈

부드럽지만 강했던 리더 - 1996년 2월 회장 취임 1년이 된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한 해 동안 LG그룹 계열사가 쌓은 혁신과 기술 성과를 공유하는 축제인‘스킬올림픽(현재 이름은 혁신한마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어울리고 있다. /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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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무 LG 회장은 1995년 50세에 회장으로 취임해 23년간 LG를 이끌며 정도(正道)·인화(人和)·고객가치 경영을 통한 '일등 LG'를 추구했다. 평생 연구·개발(R&D)에 투자하고, 인재를 키우는 것이 LG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고, 국가와 사회에 보답할 수 있는 길이라는 믿음을 실천했다. 고인은 전자·화학·통신서비스 등 LG의 3대 핵심 사업을 '글로벌 LG'로 성장시켰고, 자동차 부품·차세대 디스플레이·에너지·바이오 등 LG의 새로운 성장 사업에서도 글로벌 기술력을 갖춘 기업으로 키워냈다. 1995년 회장 취임 당시 30조원대(1994년 말 기준)였던 LG그룹 매출은 2000년대 초 GS·LS 등을 계열 분리하고도 작년 말 5배 이상인 160조원대로 성장했다. 해외 매출은 10조원에서 10배 이상인 110조원대로 증가했고, 직원수는 10만명에서 21만명으로 늘었다.

◇100년 뒤 LG를 준비한 경영인

구 회장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조용히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을 보여줬다. 동시에 과감한 결단으로 위기를 돌파했고 50년, 100년 뒤 LG를 위해 끊임없는 혁신을 이끌어 온 '승부사 CEO'였다. 구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직원들에게 "100년 이상 영속할 수 있는 기업을 만들자"는 말을 자주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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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공장 준공 - 1982년 LG전자의 미국 앨라배마주 헌츠빌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구본무(왼쪽에서 둘째)회장과 부친인 구자경(넷째) 명예회장. /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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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김대중 정부 주도로 현대그룹과 반도체 '빅딜'이 진행됐다. 당시 정부는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길 것을 요구했는데, 구 회장은 막판까지 버텼다. 그는 "대승적 차원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겠다. 디스플레이 사업만큼은 안 된다"면서 결국 자신의 주장을 관철했다. 그래서 만든 게 LG디스플레이였다. 1995년 경북 구미에 첫 공장을 가동할 때만 해도 직원 1100명, 매출 15억원에 불과했던 LG디스플레이는 임직원 3만3000여 명, 27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 1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구 회장은 취임 이듬해인 1996년 이동통신 사업(LG텔레콤)에 진출하고, 2000년 유선통신 사업을 인수했다. 2010년엔 유·무선 통합 통신사인 LG유플러스를 출범시키며 통신 사업을 LG의 주력 사업 중 하나로 올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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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CD 공장에서 - 1996년 10월 구본무(왼쪽) 회장이 LCD 공장을 방문해 생산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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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의 핵심 사업 중 하나가 된 이차전지 사업도 1992년 부회장이던 고인의 결단과 끈기의 성과물이다. 영국 출장에서 한 번 쓰고 버리는 배터리가 아니라 충전하면 여러 번 반복해 사용할 수 있는 이차전지를 접한 뒤 과감하게 투자를 결정했다. 수년간 투자에도 성과가 나지 않자 그룹 안팎에서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길게 보고 투자와 연구 개발을 더 하라. 성공 확신을 가지고 다시 시작하라"며 독려하고, 2005년 2000억원 적자를 낼 때도 뚝심으로 밀어붙여 LG화학을 이차전지 분야 세계 1위에 올렸다.

◇'일등 LG'를 향한 집념

구 회장은 2002년 신년사에서 '일등 LG'라는 화두(話頭)를 던졌다. 10분 남짓한 신년사에서 13차례나 '일등 LG'를 언급하며, 도전정신과 끈질긴 승부 근성을 강조했다. 2005년 'LG Way'를 선포한 것은 더는 선진 기업의 추격자가 아니라 새로운 기업상을 열어가는 창조자가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구 회장은 '일등 LG'와 '영속기업 LG'를 연구·개발과 인재 육성에서 찾았다. "좋은 인재를 뽑으려면 CEO가 삼고초려라도 해서 데려와야 한다. 회장이라도 직접 찾아가겠다"고 말할 정도다. 해외연구교수 지원 사업이 IMF 외환위기 당시 환율 상승으로 중단될 처지였지만 "국가 미래를 위한 인재 양성은 소홀히 할 수 없다"며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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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와 함께 - 2010년 7월 LG화학 미국 홀랜드 전기차 배터리 공장 기공식에서 구본무(오른쪽) 회장과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악수하고 있다. LG의 이차전지 사업은 이 공장을 세우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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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똑똑한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을 못 당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겁게 일하는 사람을 못 당한다"며 회사 문화 바꾸기에도 앞장섰다.

고인은 회장 취임 이후 한 해도 빠짐없이 연구·개발 성과보고회를 주재했고, 2012년부터 국내외 석·박사급 인재를 초청해 CEO가 직접 회사 비전을 설명하는 'LG테크노 콘퍼런스'를 열어 인재 확보에 앞장서 왔다. LG그룹이 4조원을 투자해 지난 4월 서울 마곡에 문을 연 LG사이언스파크도 구 회장이 융·복합 기술 혁신과 연구·개발을 강조해온 결과물이다.

◇LG 체질 바꾼 지주회사 전환

1994년 LG가 사명을 '럭키금성'에서 'LG'로 바꾸는 작업도 고인이 주도했다. 주변에서는 "럭키, 금성, 골드스타로 유명한 럭키금성을 왜 바꾸느냐"는 반대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구 회장은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외국에서도 통하는 기업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미래의 얼굴'을 나타내는 지금의 LG 심벌마크도 이 과정에서 나왔다.

IMF 직후 구 회장은 그룹의 경영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었다. 2003년 거미줄처럼 얽힌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 국내 대기업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했다.

자회사는 사업에 전념하고 지주회사는 사업 포트폴리오 등을 관리하는 지배구조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LG 창업 이후 60년 가까이 이어온 구씨와 허씨의 동업 관계도 아무런 잡음 없이 계열 분리를 마무리했다. LG 고위 관계자는 "오너 위주의 1인 지배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계열사별 책임경영 시스템이 제도적으로 뿌리내리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전수용 기자(jsy@chosun.com);곽래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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