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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 아세안] 유커 지나간 자리... 관광명소도 자연환경도 쑥대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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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동남아 휩쓰는 유커

# 지난해에만 유커 37만명 찾은

필리핀 보라카이 “6개월 폐쇄”

# 지난해 8만여명 찾은 팔라우에선

“자연 아끼는 관광객 원한다”

# 中 ‘제로바트’ 여행 유행하면서

태국 관광산업 생태계 교란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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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싱가포르 시내 켁셍타워 앞에서 단체 여행을 온 중국 관광객들이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싱가포르=정민승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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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휴양섬 보라카이는 현재 ‘관광객이 없는 섬’이다. 지난달 26일부터 6개월간 폐쇄에 들어갔다. 동남아의 대표적 휴양지로, ‘지상낙원’으로까지 불렸지만 폭발적으로 늘어난 관광객 탓에 ‘시궁창’ 이 됐다. 대책을 모색하던 필리핀 당국은 고심 끝에 폐쇄를 결정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보라카이 곳곳이 하수와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섬은 이제 ‘시궁창(cesspool)’이다. 이대로 가다간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모두 끊어지게 될 것”이라며 환경부의 폐쇄 계획을 승인했다.

세계 휩쓰는 유커

필리핀 관광청에 따르면 지난해 보라카이 섬을 찾은 외국인은 200만2,000명으로 전년(172만5,000명) 대비 16% 늘었다. 한국 관광객 수가 많던 곳이지만 유커(游客ㆍ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섬을 접수하면서 작년에는 처음으로 중국인 관광객 수(37만5,000명)가 한국(35만6,000명)을 앞질렀다. 지난해 필리핀 여행 중국인 관광객 수 97만명을 감안하면 3명 중 1명 이상이 보라카이를 찾은 셈이다. 필리핀에서 화장품 등 뷰티용품 유통사업을 하고 있는 이기진(50)씨는 “6개월 폐쇄 조치 이유는 대규모 카지노 건설 공사와 함께 저렴한 중국 단체 관광객 급증이라는 게 현지 분위기”이라고 전했다.

중국 관광객이 늘고 있는 곳은 보라카이 뿐만이 아니다. 동남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 사무국에 따르면 2015년 1,860만명이던 아세안 역내 도착(여행) 중국인 관광객이 2016년 2,000만명을 넘었다. 지난해에는 2,300명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됐다. 싱가포르의 택시 운전기사 모하마드 후세인(42)씨는 “싱가포르 어디를 가나 중국인 관광객 없는 곳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중국인 없는 식당을 추천해달라는 승객 요청이 제일 힘들다”고 말했다.

유엔 세계관광기구(UNWTO)에 따르면 전세계 중국인 관광객 수는 2000년 1,050만명에서 지난해 1억4,500만명을 기록했다. 2030년에는 4억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중국은 중산층이 늘면서 해외 여행객도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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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휴양섬 보라카이에서 마스크를 쓴 청소부들이 쓰레기를 치우고 있다. 인콰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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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곳곳이 몸살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로 피해를 입은 곳은 보라카이 뿐만이 아니다. 필리핀의 동남쪽, 태평양 서부에 자리 잡은 작은 섬나라 팔라우도 비슷한 경험을 한 바 있다. 고독을 찾은 여행자들에게 천국이던 곳이지만, 중국인들이 찾기 시작하면서 이 섬에서 사색에 잠기는 경험은 더 이상 하기 어렵게 됐다. 토미 레멩게사우 대통령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규모 여행객을 받으면 아름다운 환경이 망가질 수밖에 없다. 돈을 많이 쓰는 관광객도 좋지만 우리는 자연을 아끼면서 더 오래 머물다 가는 관광객을 원한다”고 말했다. 인구 2만2,000명의 팔라우에는 지난 2015년 8만8,500명의 중국인이 다녀갔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더 비치’로 유명한 태국 푸켓 피피섬의 마야베이도 올 6월부터 4개월 문을 닫는다. 그 동안 몰려든 중국인 관광객들 때문이다. 일일 방문자가 5,000명 수준으로 솟구치면서 숲길이 망가지고 쓰레기가 급증했다. 영화 속 모습을 기대하고 온 관광객들의 실망이 이어지자 내린 조치다. 태국 관광 당국은 마야베이 개방 이후에도 입도객을 하루 2,000명으로 제한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 중 중국인 비율(31%)이 높은 베트남도 중국인 관광객 때문에 고민이 깊다. 북쪽으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베트남에는 작년 한해 400만명 이상의 유커가 다녀갔는데, 지역 경제에도 큰 도움이 안되고 있다. 여행사에는 돈을 내지 않는 ‘제로 달러’ 관광객들이 대부분으로, 하롱베이, 다낭, 냐짱 등지에 쓰레기를 버리면서도 돈은 중국 자본이 운영하는 식당과 기념품 가게에서 쓴다.

유커 끊길까 걱정

물론 중국인 관광객들이 늘면서 일자리 등 관광 관련 산업이 발전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글로브는 “중국의 중산층 증가에 따른 해외 여행객 증가가 2019년까지 외국인 관광객 2,000만명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정부 정책에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관광산업을 신경제성장 동력으로 키우기로 하고 발리와 같은 수준의 관광지 10곳을 개발키로 한 상태다.

문제는 중국인 관광객이 몰려와 자연환경과 현지관광산업 생태계를 망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국 정부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배치를 결정하자 중국 정부가 자국민의 한국 방문을 막았던 것처럼 동남아로 나가고 있는 유커를 통해 해당 관광지와 관련 업종에 타격을 주고, 그를 통해 해당 정부에 무언의 압력을 행사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2014년 5월 중국이 베트남과 영유권 분쟁이 대표 사례다. 당시 분쟁 해역에 중국이 석유시추 시설을 설치하자 베트남 총리가 이를 비난했는데, 중국 정부의 조치로 순식간에 관광객이 30% 이상 급감했다. 관광대국 태국이 중국인 관광객들의 ‘제로-바트’ 여행 차단에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일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제로바트 여행은 여행사가 저렴한 비용으로 모객한 뒤 자신들과 연계된 식당, 선물가게를 이용하게 해 수익을 올리는 방식으로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은 주지 않으면서 관광산업 생태계로 교란시킨다.

베트남 냐짱의 한 호텔 관계자는 “중국인들이 붐비면서 호주, 유럽, 북미 손님들이 급격하게 줄었다”며 “이제 중국 관광객이 빠져나갈 경우 호텔은 문을 닫아야 하는 난처한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싱가포르ㆍ호찌민=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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