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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박수찬의 軍] 北 ‘비핵화 빅뱅’ 현실화되나…문제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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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2008년 6월 27일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밝히기 위해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하는 모습. 연합뉴스


한반도 운명을 좌우할 5월 외교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9일 일본에서 한중일 정상회의가 열리는 것을 시작으로 한미, 북미 정상회담이 잇달아 개최될 예정이다.

남북한과 주변국 정상들이 바쁜 시간을 쪼개서 먼 거리를 오가며 정상회담을 갖는 이유는 단 하나, 북한의 비핵화다. 지난달 27일 남북 정상이 합의한 판문점 선언이 실현되려면 북한 비핵화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한 비핵화에 대한 합의가 도출되면 종전선언, 평화협정, 한반도 군축 등 냉전 체제의 상징인 분단과 대립, 갈등 구도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된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비핵화 합의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절차를 거쳐야 하며, 이는 비핵화를 지연시키거나 좌초시킬 우려가 있다. 북한이 비핵화를 언급하고 있지만, 비핵화 과정에서 어떤 협상 전략을 갖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비핵화에 이르는 과정마다 지뢰밭이나 다름없는 만큼 지금부터 치밀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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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비핵화 협상과 핵개발 동시 진행 가능성

비핵화 국면을 맞아 북한의 협상 전략을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최고지도자가 국가의 대소사를 모두 관장하는 극장국가인 북한의 특성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의 최근 행보로 유추해보면 비핵화 협상 전략은 한국과 미국에 유리하지는 않다. 김 위원장은 3월 26일 북중 정상회담에서 “한국과 미국이 선의로 우리의 노력에 응답하고 평화 안정의 분위기를 만든다면, 평화를 위해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오바마 행정부 시절 체결된 이란 핵합의를 파기하려는 모습을 지켜본 북한 입장에서는 협상을 통해 얻게 될 최종적인 모습을 그리지 않은 채 단계적 조치를 앞세워 비핵화와 핵무장 강화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6자 회담이 진행중이던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감행한 전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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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6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단행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38노스 캡쳐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조치를 취하려면 한국과 미국에 제시할 ‘카드’를 준비해야 한다. 북한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와 핵실험 중단,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를 선언했다. 남북 정상회담에서는 ‘5월 중 핵실험장 폐쇄 및 언론 공개’를 제시했다. 전향적인 조치이지만 실질적 의미는 크지 않다. 북한이 6차례의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 소형화를 달성했다면 추가 핵실험은 필요 없다. ICBM 개발 과정에서 가장 기술적 난이도가 높은 대기권 재진입체 개발이 쉽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단기간 내 ICBM 시험발사 필요성도 낮다. 협상과정에서 카드로 쓰기 어려운 것부터 내놓은 셈이다.

비핵화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북한은 어떤 카드를 준비할까. 평안북도 영변 5MW 원자로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사찰을 실시한 바 있다. 그러나 2008년 폭파된 냉각탑 인근에 시험용 원자로가 들어섰고 2010년 미국 핵전문가 지그프리트 해커 박사에게 공개했던 고농축우라늄(HEU) 원심분리기도 영변에 있다.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없는 만큼 유용한 협상 카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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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군 생화학무기 대응팀 대원들이 일본 오키나와 가데나 기지에서 화학물질 탐지 및 제거훈련을 하고 있다. 미국 공군 제공


북한이 핵개발 과정에서 관영 매체에 공개한 요소들도 협상 테이블에 오를 수 있다. 김 위원장이 지난해 9월 방문했던 핵무기연구소나 대기권 재진입체 기술을 연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화학재료연구소, 국방과학원, 우라늄 정련공장,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보관 시설, 탄도미사일 시험발사가 이뤄진 평안북도 구성군과 자강도 진천군 일대,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로켓발사장 등이 포함된다. 북한 핵과 미사일 기술 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국제사회의 사찰 대상이 되기 때문에 비핵화 협상과정에서 유효한 카드다.

핵탄두와 핵물질 수량과 위치 등을 공개하는 것은 협상 막바지 단계에서 치열한 기싸움을 예고한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 목표를 달성하려면 북한 핵에 대한 파악이 우선이다. 북한 핵탄두의 정확한 수량과 핵물질 보유량은 공개된 적이 없다. 북한이 이를 공개하고 사찰을 받을 경우 완전한 비핵화가 가능하지만 거부한다면 비핵화 협상 타결은 매우 어려워진다.

◆北 비핵화 비용에 발목 잡힐 위험

북한 비핵화를 달성하려면 핵탄두와 핵물질,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반출 및 폐기, 핵개발 관련 시설 영구 폐쇄, 연구인력 재배치 등이 필요하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구소련이 해체된 후 독립하면서 2000여기에 달하는 핵탄두와 ICBM을 물려받았으나 미국, 러시아의 압력으로 이를 포기하고 자체 핵무기 개발 역량도 제거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핵탄두와 ICBM 폐기를 주도하고, 미국은 넌-루가법에 근거해 기술과 자금을 지원하면서 핵과학자 재취업을 알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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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군 생화학무기 대응팀 대원들이 일본 오키나와 가데나 기지에서 화학물질 탐지 및 제거훈련을 하던 도중 엑화 산소를 비커에 담고 있다. 미국 공군 제공


불능화시켰던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한 전례가 있는 북한의 경우 영변 5MW 원자로와 풍계리 핵실험장 등 핵시설들은 가동 불능 수준으로 폐쇄되고, ICBM과 핵탄두, 핵물질은 제3국으로 반출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비용이다. 정부 소식통은 “(비용이) 얼마나 들지 견적조차 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는 1990~2000년 폐쇄된 카자흐스탄 세미팔라틴스크 핵실험장과는 문제가 다르다. 전문가들은 풍계리 핵실험장 일대가 방사능으로 오염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미국의 북한전문매체 38노스가 지금까지 공개했던 풍계리 핵실험장 위성사진을 보면 갱도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모습이 여러 차례 포착됐다. 빗물이나 지하수가 갱도에 흘러들고 있다는 증거다. 이 물은 방사능에 오염됐을 가능성이 높지만 아무 제약 없이 강과 바다로 유입됐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본 후쿠시마 원전처럼 지하수 유입을 차단하는 차수벽을 세우고 방사능을 걸러내는 시설을 설치하며, 방사능에 오염된 지표면을 걷어내고 새로운 흙으로 덮어야 한다. 이같은 문제는 영변 핵시설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며, 5MW 원자로 해체 또는 봉인이 추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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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직후 폭발한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 지금도 막대한 양의 방사능이 하늘로 유출되고 있다. 디지털글로브 제공


이를 위해 지출해야 하는 비용은 어느 정도일까.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폐쇄 작업이 진행중인 후쿠시마 원전의 사례를 살펴보자. 일본 정부가 2016년 추산한 바에 따르면, 후쿠시마 원전 원자로 내 핵연료를 꺼내고 방사능에 오염된 물을 정화하는 등의 폐로 작업에 8조엔(약 82조원)이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염물질을 제거하고 오염물질을 제거한 폐기물을 보관할 중간저장시설 정비 등에도 4조엔(약 41조원)이 필요하다.

1986년 4월 폭발사고가 일어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은 원자로 폐로 작업은 손대지 못한 채 콘크리트 방호벽으로 사고 지역을 덮었다. 하지만 콘크리트에 금이 가면서 2016년 11월 약 21억유로(약 2조6338억원)를 들여 강철 방호벽을 새로 만들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스스로 비핵화 조치를 취한 경우가 아니라면 북한 비핵화 과정에 필요한 예산은 제3국이 부담해야 한다. 우크라이나처럼 러시아가 핵탄두 등의 폐기를 맡고 미국이 기술 및 자금 지원을 할 수 있겠지만, 가장 많은 부담은 한국이 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이 원자로 2기를 동결하는 대가로 국제사회가 경수로 2기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소요된 15억7500만달러(약 1조7000억원) 중 한국이 부담한 액수는 11억4600만달러(약 1조2300억원)에 달했다.

북한 비핵화는 국가지도자들의 결심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수많은 디테일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치밀하고 끈질기게 협상하며 머리를 맞대야 한다. 체제의 안전보장을 위해 막대한 대가를 치러가며 개발한 핵무기를 판돈으로 내놓고 비핵화 게임에 뛰어든 북한을 한국과 미국이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을까. 한반도의 운명을 가늠할 거대한 게임의 향방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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