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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9 (월)

[박수찬의 軍] ‘지상의 왕자’ 전차, 고도로 발달한 네트워크 전차로 변신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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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미국 해병대 소속 M-1A2 전차가 훈련을 위해 도로를 달리고 있다. 미국 해병대 제공


기동성을 갖춘 탈 것에 무기를 싣는 시도는 인류가 체계적으로 전쟁을 수행한 시기부터 꾸준히 이어졌다. 전장에서 인간이 걷는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이며 적을 공격하는 것만큼 유리한 전술은 없기 때문이다. 이같은 시도는 고대 그리스와 중국에서 말이 끄는 전차에 궁수(弓手)를 태우고, 중세 시대 유럽에서 마차에 대포를 설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8세기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소총으로 무장한 병사를 말에 태운 승마보병(乘馬步兵)이 등장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시도의 정점인 전차를 탄생시켰다. 당시 영국군은 기관총·대포, 철조망·참호 등으로 구축된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트랙터에 대포를 장착하는 방식으로 전차를 만들어 전선에 투입, 큰 효과를 거뒀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군이 전차를 앞세워 전격전을 감행해 세계 각국에 큰 충격을 줬다. 독일군의 성공에 자극받은 미국과 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수만대의 전차를 일선에 배치하며 군사력을 유지했다.

1950년대 전술핵무기 개발로 전차 무용론이 제기됐으나 핵폭발로 발생되는 폭풍·열·방사선을 견디면서 방사능 오염지대를 돌파할 수 있는 무기는 전차뿐이라는 견해가 등장하면서 전차는 냉전 기간 동안 지상전의 왕자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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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육군 M-1A2 전차가 사막 훈련을 위해 차체를 땅속에 숨긴 채 전방으로 포를 겨누고 있다. 미국 육군 제공


◆“축소 또 축소” 예전같지 않은 전차의 지위

하지만 냉전이 끝나면서 전차의 지위는 계속 흔들리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전차 전투였던 쿠르스크 전투와 유사한 전차부대끼리의 전면전이 마지막으로 일어난 것은 1991년 걸프전이다. 걸프전은 냉전 시절 미국과 러시아가 유럽에서 재래식 전력으로 전면전을 벌이는 것을 상정한 전략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였다. 미국 지상군은 병력 41만명, 전차 2550대를 동원, 이라크 본토와 쿠웨이트로 진격했다. 영국, 프랑스 등 다국적군은 병력 10만명과 전차 1000대를 지원했다. 이라크 지상군 병력 34만명, 전차 3475대가 이들과 맞섰지만 미국의 M-1 전차는 이라크군의 러시아제 T-72 전차를 압도하며 사담 후세인의 최정예부대인 공화국수비대를 패퇴시켰다.

1991년 걸프전 직후 수백대의 전차가 전장에서 맞붙는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대신 분쟁지역에 신속하게 파견되어 평화유지활동을 펼치는데 필요한 차륜형장갑차가 각광을 받았다. 여기에 2000년대부터 지속된 테러와의 전쟁이 특수전부대와 드론을 주축으로 진행되면서 전차의 필요성은 더욱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대규모 전차부대를 줄이고 특수전부대나 장갑차부대를 확충하는 국가들이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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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신형 T-14 전차가 모스크바에서 열린 군사퍼레이드에 참가하고 있다.


전장에서 전차의 비중이 축소되는 기조가 이어지자 러시아(T-14), 한국(K-2) 등을 제외한 주요 선진국에서 신형 전차 개발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상태다. 미국은 1979년부터 사용해온 M-1 전차를 개량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방어력과 파괴력을 강화하면서 이라크, 아프간 전쟁에서 무장조직이 자주 사용한 급조폭발물(IED) 방어능력을 추가했다. 2020년대 초부터는 차세대 디지털 네트워크와 센서 기술을 적용한 개량 작업이 진행될 예정이다. 중국은 96식 전차에 신형 엔진과 전자장비 등을 추가해 성능을 향상시키고 있다. 이스라엘과 독일, 영국, 프랑스도 현재 운용중인 전차를 개량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스웨덴, 스위스, 브라질처럼 독자적인 전차 개발 능력을 포기하는 사례도 있다. 디지털 장비 비중이 늘어나고 서로 다른 플랫폼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능력이 중시되면서 개발비가 치솟자 국산 전차 개발 대신 해외 도입으로 눈을 돌린 경우다. 터키처럼 외국의 기술을 도입하거나 폴란드, 우크라이나처럼 러시아제 전차를 기반으로 저렴한 가격의 신형 전차를 만들기도 한다. 선진국에서 퇴역한 전차를 싸게 중고로 도입하는 경우도 많다. 전차 개량이나 중고 전차 구매 소요가 늘어나면서 이탈리아나 이스라엘처럼 기존에 운용중인 구형 전차를 최신형으로 개조하는 서비스를 제안해 해외 수주를 노리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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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육군 K-2 흑표전차가 표적지를 향해 120mm 포를 발사하고 있다. 현대로템 제공


◆전차는 전차 나름대로의 역할이 남아있다

하지만 전차가 전장에서 완전히 밀려날 가능성은 낮다는 평가도 많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군은 산악지형이 많은 한반도에서 전차의 필요성은 낮다고 봤다. 그러나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면서 고지 점령 및 방어 작전을 수행할 때 즉각적이고 강한 화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전차의 중요성이 재조명됐다.

1960~70년대 베트남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정글에서는 전차가 필요치 않다는 견해가 우세했다. 그러나 베트콩과 월맹군의 공세에 맞설 강력한 화력을 즉각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부각되면서 미군은 베트남에도 전차를 지속적으로 배치했다. 이라크, 아프간 전쟁에 투입된 장갑차가 급조폭발물 공격에 잇따라 파괴된 반면 강력한 방어력을 가진 전차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튼튼하게 제작된데다 방어력도 뛰어나 일반적인 수준의 급조폭발물로는 파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군이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대형 수송기에 M-1 전차를 실어 아프간에 보낸 것도 전차만이 갖고 있는 장점에 주목했다는 평가다.

국방예산 삭감과 대(對)테러전 압박 속에서도 몇몇 선진국들은 차세대 전차 개발 가능성을 조심스레 타진하고 있는 것도 전차의 역할이 유효하다는 방증이다. 성능 개량을 지속해도 언젠가는 미래 전장 환경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신형 전차 개발 필요성은 있지만 예산 문제와 미래 기술 발전 추세 등을 함께 고려해 장기적인 차원에서 개발 계획이 추진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은 25년 안에 M-1 전차를 대체한다는 목표하에 에너지를 광속으로 발사하는 레이저, 금속탄을 초음속으로 쏘는 레일건을 비롯해 승무원이 탑승하지 않는 무인전차, 초강력 경량 장갑, 인공지능(AI) 등을 적용해 무게는 줄어들지만 전투력은 크게 높아진 신형 전차 개발을 추진중이다.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기술을 적용해 창이 없어도 전차 바깥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기술시험도 이뤄졌다. 개발이 성공하면 스트라이커 차륜형 장갑차의 기동성에 M-1 전차의 화력을 결합한 신형 전차의 등장도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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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육군 레오파드 2A6 전차가 포탐을 회전하며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프랑스와 독일은 2030년을 전후로 승무원 숫자와 차량 무게를 줄인 신형 전차 개발을 염두에 두고 있다. 서유럽에서는 유일한 신형 전차 개발 계획이라는 점에서 유럽 지상방위산업 분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영국은 인공지능을 탑재한 드론과 디지털 네트워크를 사용해 전차 승무원의 의사결정을 돕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미래 전차 개발에 필요한 생산 및 연구기반 유지를 위해 독일로부터 중고 레오파드2 전차 판매 제안을 받았음에도 이를 거부한 채 기존에 운용중인 챌린저 2 전차 수명연장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F-22 전투기처럼 적 탐지수단에 포착되지 않는 스텔스 성능을 적용하는 연구도 미국과 러시아 등에서 진행중이다.

선진국들의 전차 개발이 본격화되면 20세기 전장에서 활약하던 강철의 전차는 2030년대 이후 전쟁에서 전자제품이라 불릴 정도로 디지털화가 고도로 진행된 형태로 바뀐 네트워크 전차로 탈바꿈해 살아남을 것으로 전망된다. 수량 또한 기존에 수천대씩 운용하던 대규모 기갑부대 방식에서 벗어나 소수의 전차를 장갑차, 무인전투차량 및 드론 등과 결합해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소규모 전투부대 위주로 운용될 것으로 보인다. 전투방식도 전차끼리의 전투보다는 무인전투차량을 지휘 통제하고, 유사시 보병부대를 지원하는 위주로 변화할 전망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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