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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9 (월)

[박수찬의 軍] 한반도 운명, 이제 우리 의지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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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하기로 27일 정상회담에서 합의했다. 또한 올해 종전 선언을 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개성지역에 설치하기로 했다.

세계일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7일 오후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문에 서명 후 손을 잡고 위로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이날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에서 이같은 내용을 담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에 서명, 발표했다.

지난 9년 동안 지속된 남북 대치와 긴장,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을 해소하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해 전쟁의 먹구름을 한반도에서 걷어내는 과정의 첫발을 내디뎠다는 평가를 받는 이번 선언은 지난 1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조성된 남북 대화 분위기의 결정판이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래 남북은 한반도 정세를 스스로 풀어나가려는 노력을 수없이 기울여왔다. 1972년 7월 4일 발표한 7.4 공동성명을 시작으로 남북은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합의들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실질적인 이행 의지가 담보되지 않았던 남북 합의는 종잇장만큼의 무게감도 가지지 못한 채 잊혀졌다.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상황도 개선되지 못했다. 27일 진행된 남북 정상회담은 크게는 한반도의 운명을, 작게는 우리나라의 안보 이슈를 우리 힘으로 이끌어나가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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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7일 경기 파주시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함께 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고립과 줄타기 거듭한 한반도 외교전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외교 전략은 고립 또는 강대국 사이에서의 줄타기였다. 조선 시대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펼치며 서양 열강과의 관계를 거부했다. 영화 ‘광해’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광해군은 명나라와 청나라가 전쟁을 벌였을 당시 명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군대를 파병하면서도 전투 없이 청나라에 항복하게 하는 등 줄타기를 했다.

이같은 패턴은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직후에도 이어졌다. 북한은 사회주의 노선을 두고 중국과 구소련의 관계가 벌어지자 양측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경제, 군사적 지원을 이끌어냈다. 북한이 1960~1970년대 경제건설과 군사력 증강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원유와 식량, 무기 등을 지원받은 덕분이었다.

냉전이 붕괴되자 국제사회의 거듭된 압박과 제재로 고립이 가속화되는 국면에서도 핵과 미사일 개발에 몰두했다. 한반도 정세를 자신 뜻대로 이끌려는 시도였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통해 체제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시도를 지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냉전 시절에는 한국-미국-일본과 북한-중국-러시아의 남북 대립 구도 속에서 한국이 주도적으로 정세를 이끌어 나가기는 어려웠다. 냉전이 붕괴된 뒤에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주도권 경쟁 사이에서 협력과 갈등을 반복하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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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7일 오후 판문점에서 도보산책을 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같은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해 남북은 끊임없이 접촉하며 대화를 시도했다. ‘뭉쳐야 산다’는 말처럼 한반도 정세 주도권을 일부라도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우리측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고, 한국은 대북 화해와 한미 동맹이라는 틈에 끼어 실질적인 성과를 내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는 한반도가 강대국들 간 패권 다툼의 최전선으로 남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정상회담 이후에는 전례 없는 새로운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남북 정상회담 성과가 다음달~6월초에 열릴 것으로 보이는 북미 정상회담에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남북이 스스로 한반도 정세를 전쟁의 공포에서 평화 국면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다행히 한반도 정전체제 당사자인 미국과 중국은 정전체제를 마감하고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방안에 긍정적이다. 정상회담 성과를 바탕으로 매년 4월이면 한반도를 뒤덮었던 ‘4월 위기설’을 ‘4월 평화론’으로 바꿀 수 있도록 치밀한 후속 조치가 요구되는 이유다.

◆‘한반도 운전자론’ 실현까지는 갈 길이 멀다

문제는 정상회담 이후의 일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조금만 방심해도 한반도 정세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선 북한, 미국과의 관계 재설정 준비부터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우리나라의 안보는 북한이, 외교는 미국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북한과는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통해 평화공존으로 나아가면 안보불안은 크게 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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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육군 장병들이 2015년 3월 15일 실시된 독수리연습에서 박격포를 사격하고 있다. 미국 육군 제공


반면 미국과의 관계 재설정은 북한보다 훨씬 까다롭다. 한미 동맹을 지탱해온 힘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반공주의로 냉전 시절 인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하지만 외부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오월동주(吳越同舟)식 동맹관계는 갈등과 반목이 끊이지 않는다. 이란 위협 대응이라는 것 이외에는 공통된 점이 없어 갈등과 우호 관계를 오가는 미국과 아랍 국가들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한미 동맹도 마찬가지였다. 북한 위협 대응을 위해 강력한 군사동맹체제를 구축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갈등 분출과 수습 국면이 반복됐다.

따라서 북한 위협에 기반한 한미 동맹을 한국과 미국이 중시하는 공동의 가치를 수호하는 동맹 관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촛불혁명 등을 통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계속 성숙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미국과 민주주의, 자유, 인권, 시장경제 등의 가치를 공유하고 발전시키는 관계를 추구할 수 있다. 군사적 측면에서도 동맹의 범위를 동아시아로 확대해 평화유지활동 등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는 한반도 방위에 국한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이 필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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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한국 공군 F-15K 전투기와 주한 미국 공군 F-16 전투기, 영국 공군 타이푼 전투기가 한반도 상공에서 연합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공군 제공


정전협정 당사자인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한 이후에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외교 활동이 필요하다.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정전체제를 관리해온 유엔군사령부는 해체 수순을 밟게 될 가능성이 크다. 유엔군사령부가 주한미군 위주로 구성되어 있지만 6.25 전쟁에서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국가들은 별도 유엔 결의 없이 한반도 유사시 즉각 개입할 수 있다. 하지만 유엔군사령부가 해체되면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반도 유사시 군사전력을 제공해야 하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콜롬비아 등의 국가들과 정전체제를 감시하고 있는 스위스, 스웨덴은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의무가 사라진다. 이들 나라들이 한반도 개입을 포기하면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의해 한국 방위 의무를 지고 있는 미국만 남게 된다. 결과적으로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도는 지금보다 더 높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같은 역설적 상황을 방지하려면 유럽연합(EU),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아세안 등 세계 각국의 다자 기구와 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유엔군사령부에 소속된 국가들과의 양자 관계도 전략적 수준으로 격상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전략적 관계를 맺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나라에서 생산하는 전략무기를 구매하는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의 압력으로 아랍 세계에서 고립된 카타르가 미국, 영국, 프랑스로부터 전투기를 잇따라 구매하는 것은 이들 국가의 전략무기를 구매해 높은 수준의 양자 관계를 단기간에 구축하겠다는 의도다. 이외에도 합동 군사훈련이나 전략대화 등을 통한 교류협력 강화도 고려할 수 있다는 평가다.

27일 열린 남북정상회담은 9년 동안 막혀있었던 한반도의 대화 동맥을 일거에 뚫은 것으로 향후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후속 조치에 대한 치밀한 고려와 전략 수립이 없다면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 수도 있다. 한반도 운전자론은 이벤트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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