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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매경이 만난 사람] 데뷔 50주년 전국투어 나서는 `영원한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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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지난 23일 서울시 서초동 YPC프로덕션에서 만난 조용필이 기자의 질문에 답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68세인 그는 스무 살은 어려 보이는 동안의 비결로 `소식·규칙적인 운동·금주`를 꼽고 "오늘은 메이크업으로 결점을 많이 가렸다"며 웃었다.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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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YPC프로덕션. 창밖에는 차가운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회색빛 선글라스를 낀 가왕 조용필(68)은 허공을 바라보면서 음악 인생 50년을 되돌아봤다.

다섯 살 때 처음 하모니카를 잡고 음악에 빠진 그는 1968년 서울 경동고등학교 3학년 때 가출을 했다. 공대 기계과에 다니는 형의 제도기(도안 그리는 데 쓰는 도구)와 백과사전을 훔쳐 서울 청계천에서 팔아 중고 악기를 샀다. 그 악기들로 그룹 '애트킨즈(Atkins)'를 결성해 미8군 클럽에서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다.

"부모님이 악기를 사주지 않으니까 (형 물건을) 훔칠 수밖에 없었죠. 담장 너머로 물건을 던지면 애들이 받아서 같이 도망쳤어요. 그래도 얼마 안 돼서 무릎 꿇고 사죄한 후 다시 집에 들어갔습니다. 허허."

평생 음악밖에 몰랐다. 원래 성격이 그렇다. 한번 꽂히면 그것만 파고든다.

외골수로 음악에만 매달려 혁신을 거듭한 덕분에 세대를 아우르는 국민 가수가 됐다. 이제 그의 콘서트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가 함께 즐기는 3대 가족 나들이 공연이 됐다.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 1980년 '창 밖의 여자' '촛불' '단발머리', 1981년 '고추잠자리', 1982년 '못 찾겠다 꾀꼬리', 1983년 '친구여', 1985년 '여행을 떠나요' '허공' '킬리만자로의 표범', 1988년 '서울서울서울', 1991년 '꿈', 2013년 '바운스' '헬로' 등 쉼 없이 공전의 히트곡을 내며 국민과 희로애락을 나눴다.

한국 대중 음악의 산 역사인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주저했다. "가왕, 선생님은 부담스러워요. 그냥 조용필 씨라고 불러주세요." 그렇게 부르자니 예의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는 "'씨'가 참 좋은 말인데. 모든 사람에게 붙이고 평범하게 느껴지니까. 나도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가왕은 한없이 겸손했다. 그냥 '용필 오빠'라 부르면 어떠냐고 묻자 "좋죠"라고 답하며 환하게 웃었다.

―데뷔 50주년 전국 투어를 앞두고 있는데, 요즘 하루 일과가 어떤가.

▷공연 리허설하고 총감독과 일일이 (무대를) 체크하고…. 밤늦게까지 이거밖에 없다(그의 콘서트는 5월 12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 5월 19일 대구 스타디움, 6월 2일 광주 월드컵경기장, 6월 9일 의정부종합운동장 등에서 열린다).

―보통 때 노래 연습은 얼마나 하나.

▷음악을 틀어놓고 목을 푸는 정도밖에 안 한다. 요즘은 리허설이 있어서 따로 안 한다. 목만 다치니까….

―운동은 하시는지. 예전에는 골프를 많이 쳤는데.

▷골프는 올해 들어서는 못 쳤다. 일주일에 두세 번 집에서 헬스 PT(퍼스널 트레이닝)를 받는다. PT가 없는 날에도 매일 저녁 두세 가지 운동은 꼭 한다(그는 2015년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은 후 꾸준히 근력 강화 운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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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주년 공연 때 3D 애니메이션 '킬리만자로 표범' 등 첨단 기술을 많이 활용했는데, 이번에는 AR(증강현실)나 VR(가상현실)를 활용한 무대를 기대해도 될까.

▷이번에는 솔직히 참견을 못했다. 총감독한테 모든 걸 일임하고 '굉장히 중요하니까 잘해야 해'라는 이야기밖에 못했다.

―무대 공포증은 없을것 같다.

▷무대에 나가기 전에는 아직도 떨린다. 오늘 잘해야 하는데, 모니터가 좋아야 하는데…. 인이어(외부 소리를 차단하고 연주 소리만 듣는 모니터 장치)를 귀에 꽂으면 굉장히 답답하고 머리 회전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최초의 오빠 부대(필그림·필무리·필의 평화)가 여전히 콘서트를 홍보하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오래된 팬이 있나.

▷1980년부터 40년 가까이 쭉 오는 팬들이 있다. 보면 기억이 나고 그렇다.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50주년을 치를 수 있는 것이다. 관객이 없는 무대는 있을 수 없는 것처럼 팬이 없는 가수는 힘들다. 팬들이 없다면 50주년 공연을 할 수 있었을까? 그 사람들이 있었기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하다.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꿈'을 꼽았다.

▷좋아한다기보다는 연습할 때 '꿈'부터 시작한다. 음역대가 중음 고음 저음 골고루 섞여 있다. 그다음 '단발머리'를 부르면 목은 다 풀린다.

―노래를 통해 꿈을 심어주겠다는 사명감으로 만든 노래가 '꿈' 아닌가.

▷(LA행) 비행기 안에서 신문을 보다가 '농촌에 청년이 없다'는 기사를 봤다. 그때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었다. LA 가는 데 10시간 정도 걸리는데, 부모님은 벌써 나이 드셨고, 청년이 없으면 농사는 누가 짓나, 도시에만 몰려들면 어떡하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꿈'을 만들었다. 한강에 대한 노래가 필요할 것 같아 '한강'을 만들었고, '못 찾겠다 꾀꼬리'는 나이 들어서 동심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만들었다.

―흙수저로 취업난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을 위로할 '꿈' 2탄을 만들면 어떨까.

▷2탄이라기보다는 꿈이라는 단어 자체가 좋으니까 가사에는 많이 들어가겠지. 어떤 사람이 90세가 됐다고 꿈이 없어질 수는 없지 않나. 그 나이 나름대로 꿈이 있을 것이니까. 꿈은 우리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스무 번째 앨범은 언제 나오나.

▷5~6곡 정도 만들었는데 50주년 공연으로 중단됐다. 처음에는 그냥 조촐하게 체조경기장에서 2~3일 공연하고 싶어 주경기장을 거부했다. 하지만 주위에서 밀어붙여서 일이 커졌다. 그런데 굉장히 뜻밖이었다. 팬들도 그렇고, 언론에서도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가져주고 기사가 쏟아져 나와 놀랐다.

―새 앨범에 EDM(Electronic Dance Music)도 들어가나.

▷요즘 사운드는 EDM이 60~70%다. 들어가는 건 당연하다.

―의외의 피처링을 기대해도 되나. 가수 아이유와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렇다면 해야지. 하하. 그런데 아직 계획은 없다.

가왕·선생님 말고 조용필씨라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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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후배, 동료 가수들에게 존경을 받는 혁신의 아이콘인데, 젊은 세대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은행에 들어간 사람이나 기업에 들어간 사람이나 정년까지 일하길 바란다. 음악인도 마찬가지다. 내가 죽을 때까지 하고 싶다는 건 똑같을 것이다. 그러려면 자신을 만들어야겠지. 각자 방법이 다르지만 꾸준히 하면 된다. 기록을 만들려고 내가 가수를 한 건 아니다. 하다 보니깐 그런 기록이 생긴 것이다. 꾸준히 하다 보면 자기 노래와 소리가 생긴다. 인기는 그저 파도와 구름, 바람 같다. 꾸준히 지켜가면 된다.

―지난 평양 공연 '봄이 온다' 때 감기와 후두염으로 컨디션이 안 좋았는데.

▷평양 공연이 갑자기 생겨서 가기 전에 무리했던 것 같다. 사실 3월부터 (50주년 전국 투어) 리허설을 하고 있었는데 중간에 평양 공연이 결정되는 바람에 스케줄이 완전 뒤죽박죽 딜레이됐다. 가수들이 여기 와서 연습을 하고 '위대한 탄생'(조용필 밴드)이 만든 곡도 있고…. 최악의 몸 상태로 평양에 갔는데 병원에서 "굶고 살았네요"라고 하더라. 너무 센 항생제를 먹고 설사를 계속해서 영양실조에 걸린 것 같다.

―그렇게 고생했는데 북한 공연 제안이 들어오면 또 할 건지.

▷물론. 그런데 하려면 빨리 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 거기(북한)는 20대까지 가수를 하고 30대면 뒷전으로 물러난다. 이번 공연 때도 70세가 다된 내가 노래할 수 있느냐고 물어봤다고 하더라(웃음).

―1986년 일본에 진출해 '추억의 미아1'로 100장 이상 판매했다. 한류 원조로서 요즘 한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요즘 한류 대단하다. 우리하고는 비교도 안 된다. 요즘 아이돌은 전 세계에서 인기를 얻고 있어서 나한테 한류의 원조라고 하는 것도 부끄럽다.

―노래방에 가서도 선생님 노래만 부른다고 들었다.

▷와이프(고 안진현 씨)가 좋아해서 '떠나가는 배'(정태춘 노래)도 불렀다. 노래방에 간 지도 10년 넘었다. 요즘엔 안 간다. 술 자체를 안 하니까. 예전엔 거기서 친구들을 만났다. 만나면 꼭 노래를 시킨다.

―서울 서래마을 전세 아파트에 살면서도 기부를 계속하고 있다는데.

▷얼마전에 안 쫓겨 나려고 구입했다. 예전에 그 아래층에 살고 있었는데 몇 억원을 손해 보고 팔아서 다시는 집을 안 사려고 했다. 그런데 요즘 전세금이나 집값이 거의 같아서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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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기부를 하나.

▷할 때는 하고, 아닐 땐 안 한다(그는 2003년 세상을 떠난 부인 안진현 씨가 남긴 유산 24억원 전액을 심장병 어린이를 돕기 위해 기부했다. 2009년에는 조용필장학재단을 설립해 소아암 어린이와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돕고 있다. 소속사 YPC프로덕션은 그동안 최대 주주인 조용필에게 현금 배당을 하는 대신 사회에 기부해왔으며 전체 기부액은 20억원을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 때는 언제였나.

▷많이 있었다. 만 68년을 살았는데, 그 이야기를 하자면 한참 길다. 아무래도 아내가 병원에 있을 때가 제일 힘들었다.

―사별한 지 15년이 지났다. 다른 사람은 안 보이나.

▷이제 나이가 너무 들어 엄두도 안 난다. 누가 나와 연애를 하겠나. 오늘 사진을 찍는다고 메이크업을 해서 좀 나아 보이지만 몸이 한 해 한 해가 다르다.

―음악을 안 했으면 어떤 일을 했을까.

▷사업을 했을 것 같다. 구멍가게든 중소기업이든….

He is…

△1950년 경기 화성시 출생 △1968년 서울 경동고 졸업 △1968년 그룹 '애트킨즈' 멤버로 데뷔 △1974년 밴드 '조용필과 그림자'(1979년 '위대한 탄생'으로 개칭) 결성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 히트 △1980년 '창밖의 여자' 발표(100만장 판매) △1980년 미국 카네기홀 공연 △1984년 일본 '골든디스크상' 수상 △2005년 평양 류경체육관 단독 공연 △2009년 조용필 장학재단 설립

[대담 = 김주영 문화부장 / 정리 = 전지현 기자 / 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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