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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인도 출신 페미니스트 시인 루피 카우르의 시집 ‘해와 그녀의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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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 카우르(26)는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페미니스트 시인 중 한 명이다. 2014년 무명의 상태에서 자가 출판한 첫 시집 <밀크 앤 허니>는 아마존과 뉴욕타임스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300만부 이상 판매됐고, 30개 언어로 번역·출간됐다. 그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250만명이 넘는다.

2017년 10월에 나온 카우르의 두 번째 시집 <해와 그녀의 꽃들>이 최근 출판사 박하를 통해 국내 번역·출간됐다. 이 시집 역시 6개월 남짓한 기간에 100만부 이상 팔렸다.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한 카우르는 이번 시집에서 다섯 가지 꽃의 여정(시듦·떨어짐·뿌리내림·싹틈·꽃핌)으로 목차를 나누고, 여성으로 태어나 겪는 차별과 폭력의 세계를 시와 그림을 풀어냈다.

시집을 읽는 것은 카우르의 생존기를 읽는 것과 같다. 그는 인도 펀자브에서 태어나 네 살 때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서 그곳에서 성장했다. 카우르는 여아낙태가 당연시되는 남아시아 문화권에서 살아남았고, 사춘기 때 남자아이들이 자신의 신체를 희롱해도 그저 조신하게 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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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여성의 몸. 카우르는 “넌 저들만큼 예쁘지 않”다며 자신의 몸에게 “모질게” 굴었다. 그는 여성은 침묵과 순종을 강요받는다고 고발한다. “안 돼요는 우리 집에서 나쁜 말이었어/안 돼요라 말하면 매를 맞았지/(중략)/그가 나를 덮쳤을 때/내 온몸이 거부했지만/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안 돼요라고 말하지 못했어”(‘어릴 때 배우지 못했는데, 커서 어떻게 동의를 말하겠는가’ 본문 중)

카우르는 데이트 폭려과 성폭력으로 무너진 삶을 글로 풀어냄으로써 살아남았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기록한 시 ‘집’에서 카우르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비난할 수는 없어/너의 죄를 지고 가는 게 너무 무거워ㅡ내려놓을 거야/마치 그게 내 것인 양/너의 수치심으로 이곳을 장식하는 일에 지쳤어”라고 외친다.

2015년 3월 어느날 카우르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생리혈 자국이 선명한 회색 바지를 입고 침대에 등을 돌린 채 누워 있는 사진을 올렸다. 인스타그램은 가이드라인을 따르지 않았다며 해당 사진을 삭제했다.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벌거벗은 신체를 노출한 사진들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으면서 여성이라면 당연히 경험하는 생리 사진은 왜 삭제되어야 하는가?” 카우르는 대중에게 물음을 던졌고, 이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공론화됐다. 결국 인스타그램은 일주일 후 사진을 삭제한 것은 실수였다고 사과했다.

카우르는 10대 때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발표해 ‘인스타 시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문학을 사랑했지만 유명한 작가들은 모두 백인 남성”이었다며 어디에도 자신과 같은 시인은 없다고 말한다. ‘어린 유색인종 여성’이 새로운 매체를 통해 시의 명성에 도전하고 유명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문단의 이슈가 됐다. 일각에서는 그의 시집 독자가 대부분 젊은 여성이라는 것을 두고 작품성을 낮춰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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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그녀의 꽃들>의 일부 시들은 사랑과 이별의 정서를 노래한다. ‘해’는 사랑하는 대상. 그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 꽃이 시적 화자다. 연인에 대한 연가이기도 하지만, 여러 편의 시에서 눈에 띄는 것은 자신과의 화해다. 카우르는 여성으로서, 이민자로서 배제돼왔던 자신을, 스스로가 사랑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네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방식/네가 자신을 하찮은 것으로/비하하는 방식들은/모두 학대야”(‘자해’ 전문)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최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답과 우리가 원하는 힘을 우리 안에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카우르는 “나는 앞서 살았던/수백만 여성들의/희생을 딛고 서서/생각한다/내가 어떻게 하면/이 산을 더 높게 만들어서/나 이후에 살 여성들이/더 멀리 보게 할 수 있을까”(‘유산’ 전문)를 고민한다. “마치 자궁과 가슴에서/영양분을 받은 적 없는 사람처럼/당신은 피와 모유를/안 보이게 치워두려 한다”(‘인간’)고 비판하고 “우리가 부숴야 할 유리천장이 있다”(‘이곳의 지붕을 없애버리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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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의 글쓰기는 힘이 세다. 카우르의 시집이 그렇다.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미투 운동에 맞춰 더욱 주목받고 있다. 카우르는 미투 운동의 성공에 대해 이렇게 예견한다. “미래 세대가 지금의 미투 운동을 돌아봤을 때 이전 세대가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의아해할 만큼 일상적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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