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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진짜 명예회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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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빈딘성으로 가는 길-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의 기억과 약속을 찾아서
전진성 지음/책세상·1만4800원


#1. 베트남전 전세가 기울어 미군이 철수 중이던 1972년 6월, 베트남 중부 빈딘성의 성도 꾸이년 인근에 주둔한 맹호부대의 박순유 중령은 적이 기습공격을 노린다는 첩보를 받고 출동했다가 매복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파병된 지 반년도 안된 시점이었다. 부산에 남았던 부인은 38살, 4남2녀의 다섯째 박숙경씨는 다섯살이었다.

숙경씨는 32년이 흐른 2004년 베트남을 여행하다가 빈딘을 찾았다. 아버지와 베트남 주민들의 비극을 실감한 그는 베트남과 한국 사이에 얽힌 매듭을 풀고 싶었다. 박씨 가족들은 서로 눈물을 닦아주며 아버지가 전사한 빈딘에서 좋은 관계를 만들어 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2007년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 ‘고 박순유 한-베 평화장학기금’을 조성하고 매년 40명의 베트남 학생을 지원하고 있다. 2010년에는 아버지가 전사한 현장을 현지 주민들의 도움으로 찾아냈다. 장학사업을 하면서, 박씨 가족들은 베트남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2. 6월항쟁이 있었던 1987년 말 베트남 참전군인 350명은 ‘따이한 클럽’을 결성했다. 현재 ‘대한민국월남참전자회’의 모태다. 이들은 ‘가해자’, ‘용병’이라는 비판에 맞서 참전기념물 건립운동을 펼쳐나갔다. 1992년 5월 충북 옥천을 시작으로 월남전참전기념비가 전국에 수십개나 세워졌다.

한국에서 베트남전 참전의 기억과 상처에 임하는 상반된 두 사례다. 자주와 독립을 찾으려던 베트남 인민들, 이를 반공 논리로 짓밟은 미국, 이런 미국의 참전 요구에 안보와 국익이라는 실리 때문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 정부, 국가의 명령으로 베트남에 갔던 군인들, 현지 주민들에게 총을 겨누고 죽여야만 했던 파병 장병들이 직면한 상황들, 전쟁이 끝난 뒤 쉬쉬하다가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 했던 참전’이냐 ‘무고한 인민들의 살상에 가담한 용병’이냐를 두고 갈리는 논란들….

<빈딘성으로 가는 길>은 맹호부대 주둔지 빈딘의 40여년 전 현장과 그 곳에 있었던 파병 용사와 그 가족들의 기억과 삶이 거름이다. 빈딘은 한자로 ‘평정’(平定)이다. 그러나 그 곳에 갔던 한국의 파병군인들은 지금 평정(平靜)하지 않다.

저자는 빈딘성에서 벌어졌던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월맹군의 연대 병력 남하를 한국군 2~3개 중대 병력으로 막아낸 안케 전투, 자신의 몸을 산화하며 동료와 부하들을 지켜낸 파병 군인들의 용기와 전우애, 정글의 무더위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녹아버린 군인들의 비극, 귀국 뒤 국가의 무관심과 대중의 혐오 대상이 되어버린 파병 군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베트남 파병이 한창일 때 가수 김추자는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 때 김 상사는 조국을 위해 헌신한 친근한 아저씨였다. 하지만, 지금 김 상사는 태극기를 들고 군복을 입고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구호를 광장에서 외치는 소외된 노인이다.

저자는 국가의 명령에 따라야 했고, 자신이 살기 위해 총을 겨눌 수밖에 없었던 참전 군인들의 비극을 우리 사회가 보듬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파병 군인사와 그 가족들도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조국을 지켜냈다는 기억에서 잠시만이라도 벗어나 전혀 다른 관점에서 펼쳐내는 이야기를 인내심을 갖고 경청해주시실 바란다. (…) 가해와 피해 당사자들이 스스로 나서지 않는 한 과거사의 얽힌 실타래는 결코 풀릴 수 없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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