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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세상 읽기] ‘공정성’이라는 이름의 유령 / 이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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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이원재
LAB2050 대표·경제평론가


“학력고사가 가장 좋은 입시였어요.”

그는 진지한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뜻밖의 이야기라 왜 그런지 되물었다.

“가장 공정한 평가였습니다. 시험만 잘 치르면 성공할 수 있으니까요.”

그는 경제전문가다. 불평등한 분배에 대해 마음 깊이 분노하는 이다. 획일적 교육제도에도 문제의식이 큰 사람이다.

“입시가 복잡해지면서 시골 출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서울대에 갈 수 있는 길이 막혔습니다. 불공정합니다.”

‘공정성’이라는 유령이 우리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이 유령의 손이 닿는 곳마다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갈등이 증폭된다.

아이들 교육을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 이 유령은 괴력을 발휘하며 판도를 흔들고 있다. 대입 전형 방법 중 하나인 ‘학종’(학생부종합전형)이 공격 대상이 됐다. 점수를 산정하는 과정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공정하지 않다고 한다. 시험 점수 이외의 활동을 중시하기 때문에 ‘금수저 전형’이라고 한다. 수능 같은 지필시험만 공정하다는 논리다. 김상곤 교육부 장관은 학부모들이 ‘공정한 입시제도’를 원한다고 말하며 대학입시 개편안을 ‘열린 안’으로 내놓았다.

이 유령은 지난해 한창 논쟁이 벌어졌던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도 등장했다. 인천국제공항공사에 재직 중인 정규직 직원들은 ‘공정성’을 이유로 비정규직의 정규직 입사를 반대했다. 자신들은 고생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시험에 합격해 입사했는데, 그렇지 않은 자들을 받아들이는 일은 불공정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의 평균 연봉은 9천만원이고, 정년을 보장받는다.

공정성은 이제 시대정신이 된 것인가? 특히 미래세대에게 그런가?

문제는 그 이름이 아니라 내용이다. 대학에서 학생을 선발하는데, 한 차례 치른 시험 점수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옳은가? 모든 학생이 모든 교실에서 같은 내용을 배우는 시대라면, 그 내용만 알면 세상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다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갔고,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안다.

학교는 변화하고 있다. 학생들끼리 과제를 진행하는 일도 많아지고, 그룹토의도 잦아진다. 학생들의 관심에 따라 공부하는 과목이 서로 달라지고 있고, 더 달라져야 한다. 이 모든 활동이 교육이다. 당연히 한 번의 시험으로 평가할 수 없다.

공공기관에서, 기업에서 직원을 평가하는 데 표준화된 객관식 필기시험만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공정한가? 그렇지 않다. 일을 잘할 잠재력이 있는 이들을 선발하는 것이 공정하다. 같은 가치를 지닌 일을 하는 이들이라면, 같은 보상을 받는 것이 공정하다. 비정규직이라도 일의 성과가 좋다면, 채용되고 승진하는 것이 공정하다. 평가 방식은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다. 사람들이 갖춰야 할 능력은 다양하고 유동적이다. 계량화된 시험만으로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기는 불가능하다.

‘공정성이냐, 학교 수업 정상화냐.’ 잘못된 질문이다. 학교 수업을 다양화, 정상화하는 게 가장 공정하다. 학원 안 다니는 학생들, 입시를 목표로 살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더 그렇다. ‘공정성이냐, 비정규직 처우 개선이냐.’ 역시 틀린 질문이다. 비정규직도 일한 데 맞는 처우를 얻는 것이 공정하다. 시험 한 번 잘 치렀다고 평생을 보장하는 시스템은 공정하지 않다. 교육에서도, 노동에서도 마찬가지다.

교육전문가들은 “사람들은 자신이 성공한 입시가 공정하다고 믿는다”고 한다. 학력고사 그리워하던 그 역시, 학력고사 잘 치르고 좋은 대학 갔던 사람이다.

‘공정성’이라는 이름 아래 시험 성적 만능주의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유령, 이제 그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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