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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월)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2] 헨리 3세 무릎 꿇린 프랑스 귀족, 기사·공민 소집한 게 의회제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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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민주주의가 시작된 영국 루이스 전투 현장을 가다 백작령 상속받으려 바다 건너와 왕의 총신이 된 명장 몽포르 반란을 진압하고, 왕에 배신당해 그는 귀족들과 칼을 들고 루이스 전투에서 축배를 들었다 1265년 1월 첫 소집된 의회 각 주에서 기사 2명씩 도시선 공민 2명이 옵서버로 참석 영국 의회민주주의 토대 됐다 비록 그는 누구도 찾지않는 이브샴의 공원에 잠들어 있지만 그의 정치실험 '대의제 정부'서 우린 자유와 행복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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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


런던에 갈 때마다 빼놓지 않고 찾아가는 곳은 의회의사당이다. 이곳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요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고, 국민의 대표가 국정을 책임진다는 사상이 자라고 실천에 옮겨졌다.

대헌장(Magna Carta)이 조인된 지 800주년이 되는 2015년에는 건물 안에서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다. 의사당에서 가장 오래되고 넓으며 상징적인 웨스트민스터 홀에 거대한 현수막 18개가 걸렸다. 각각의 현수막에 담긴 내용은 영국이 오늘날까지 민주주의와 자유를 발전시켜 오는 과정에서 중요했던 사건과 법안들이었다.

가장 강렬하고 인상적인 작품은 '1265 SIMON DE MONTFORT PARLIAMENT'란 제목의 작품이었다. 빨간 바탕의 긴 현수막에 오렌지 색으로 'democracy to come(민주주의가 온다)'이라 적혔다. 의회의사당, 시몽 드 몽포르, 그리고 민주주의. 묘한 삼위일체다. 작품설명집 서문에는 시몽 드 몽포르가 의회를 구성한 지 750년이 된 해를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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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기사의 투구 본뜬 루이스 전투 기념물 - 중세 기사의 투구를 본뜬 루이스 전투 기념물. 이 전투의 승리로 권력을 장악한 시몽 드 몽포르는 처음으로 국민의 대표를 선출해 정치에 참여시켰다. /루이스=송동훈 문명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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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 의한 통치를 요구한 대헌장이 조인된 지 50년 만에 영국인들은 국민의 대표를 모아 정치한다는 또 한 번의 대실험을 시도하 것이다. 물론 왕의 자비(慈悲)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대헌장 때와 마찬가지로 폭정과 그에 맞선 격한 저항 끝에 얻어진 피의 결과였다. 그 모든 사건 전개의 중심에는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1208~1265년)란 한 남자가 있었다. 대의제의 개척자다.

루이스 전투에서 마주 선 두 남자

시몽 드 몽포르의 정치 실험은 런던 남서쪽에 위치한 석세스주(州)의 루이스(Lewes)에서 시작됐다. 루이스는 전형적인 영국의 시골 도시다. 부드럽게 펼쳐진 푸른 녹지 위에 옹기종기 돌로 만들어진 집들이 모여 도심을 이뤘다. 그 한가운데 자리를 중세 성채가 차지하고 있다. 고개를 한껏 젖혀야 보일 정도로 망루는 높고, 촘촘하게 쌓아올린 성벽은 강인하다. 최근에 만들어져 잘 정돈된 계단을 타고 성 위로 올라가면 사방이 탁 트였다. 중세에 이 성은 주민들에게 권력인 동시에 수호자였을 것이다. 750여 년 전인 1264년 5월 당시 이곳은 전쟁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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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의회의사당 런던의 상징이자 대의제 민주주의의 요람인 런던의 의회의사당,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프랑스인 시몽 드 몽포르에 의해 시작됐다. /런던=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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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지키는 쪽의 수장은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였다. 쳐들어 온 쪽의 총사령관은 시몽 드 몽포르였다. 수적으로는 왕이 우세했다. 높다란 곳에 위치한 성과 요새처럼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싸인 수도원을 근거지로 삼았으니 입지도 유리했다. 왕을 향해 칼을 뽑은 반란군은 규모도 작았지만, 무장도 변변치 않았다. 모든 면에서 불리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왕의 나쁜 정치로부터 스스로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려는 '열정'이 있었다. 또 명장 시몽 드 몽포르가 있었다. 기습과 분리, 역공과 최대의 압박. 격한 전투 끝에 왕은 항복했다. 당시 왕이 주둔했던 수도원 너른 정원에는 루이스 전투 기념물이 서 있다. 투구를 쓴 거대한 기사의 두상(頭像)이다. 투구 장식을 따라 전투 전후의 장면들이 조각돼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자 문양의 방패를 든 기사의 조각이다. 그가 시몽 드 몽포르다.

왕의 寵臣에서 반란의 首長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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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대신 왕국을 장악한 몽포르는 외국인이었다. 할머니를 통해 잉글랜드 귀족의 피도 일부 물려받았지만 기본적으로 프랑스인이었다. 당시 왕이었던 헨리 3세(Henry Ⅲ 1207~1272년, 재위 1216~ 1272년)는 존 왕의 아들이다. 존이 대헌장을 승인한 다음 해 갑자기 죽자 어린 나이에 왕이 됐다. 헨리는 아버지 존처럼 비열하진 않았다. 그러나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항상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허황된 계획에 몰두하는 가벼운 사람이었다. 외국에서 온 외척들을 총애했고 그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베풀었다. 외척은 두 부류였다. 왕비인 프로방스의 엘레노어(Eleanor of Provence)의 외삼촌들과 어머니인 이사벨(Isabella of Angoulême)이 존 왕 사후 재혼해서 낳은 9명의 동생들.

왕은 그 많은 외척에게 수많은 작위와 영지를 내렸다. 원래는 토박이 잉글랜드 귀족들이나 더 자격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었다. 무능력한 왕의 총신들은 오만하고 탐욕스러웠다. 외척과 그들을 비호하는 왕을 향한 국민적 분노는 착실히 쌓여갔다.

시몽 드 몽포르 역시 왕의 가족 중 한 명이었다. 할머니 소유였던 레스터 백작 작위와 백작령을 상속받기 위해 잉글랜드로 건너왔는데, 헨리 3세의 여동생 엘레노어(Eleanor of England)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그는 왕 주변의 친·인척 중에 유일하게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가혹했지만 용맹한 전사였으며, 부정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뛰어난 관리자였다. 스스로 능력을 갖췄던 탓에 몽포르는 왕 앞에서 고분고분한 '예스맨'이 될 수 없었다. 헨리 3세와 시몽 드 몽포르의 관계는 그래서 언제나 아슬아슬했고, 단절과 화해를 거듭했다.

두 사람 사이가 결정적으로 어긋난 건 가스코뉴 때문이었다.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가스코뉴는 잉글랜드 왕에게 유일하게 남은 프랑스 내의 영지였다. 그곳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헨리 3세는 몽포르를 파견했다. 상황은 엄중했다. 지역 귀족들과 백성들의 반(反)잉글랜드 감정은 드셌고, 이웃 국가 나바르와 프랑스의 왕들은 가스코뉴를 욕심 냈다. 몽포르는 단기간에 반란을 진압하고 외세의 개입을 차단했다. 질서는 회복됐고 잉글랜드 왕의 권위가 다시 섰다. 그 과정이 지나치게 무자비했기 때문에 울분에 찬 가스코뉴 사람들은 몽포르를 왕에게 고발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왕은 몽포르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 가스코뉴를 이미 얻었기 때문이었을까? 몽포르 대신 왕의 장남 에드워드 왕자가 가스코뉴의 영지로 파견됐다. 자부심 높은 기사는 모욕받고, 버림받았다. 몽포르의 가슴에는 불신과 분노가 쌓였다.

왕에게 버림받은 것은 몽포르뿐이 아니었다. 헨리 3세의 아버지가 인정했던 귀족의 권리도 마찬가지였다. 왕의 자의적인 통치에 귀족들이 항의할 때마다 헨리 3세는 대헌장을 재확인했다. 일곱 번의 약속, 그리고 일곱 번의 약속 위반. 교황의 꼬드김에 빠져 자신의 둘째인 에드먼드 왕자를 위해 시칠리아 원정에 나서겠다고 했을 때, 귀족들의 인내심은 바닥났다. 1258년 옥스퍼드에서 대자문회가 열렸다. 귀족들은 관례에 어긋나게 칼을 차고 출석했다. 그들은 왕을 압박해 왕권을 제약하는 각종 개혁의 승인을 요구했다. 대헌장의 재판(再版)이었다. 헨리 3세는 아버지 존이 그러했듯이 앞에서 무릎 꿇고, 뒤에서 배신했다. 열혈 귀족들은 다시 칼을 들었다. 그 맨 앞에 시몽 드 몽포르가 섰다. 한때의 총신은 루이스 전투에서 반란의 수장이 됐고, 승리를 거둬 잉글랜드의 주인이 됐다.

代議정치를 시작하다

13세기 영국에서는 농촌의 하급 기사들과 도시의 공민들이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몽포르는 새로운 정권의 기반과 정통성을 이들 신흥계급에 의존하고자 했다. 1265년 1월 역사적인 의회(Parliament)가 소집됐다. 지방 행정단위인 각 주(Shire)에서 2명의 기사가, 각 도시와 성읍(Borough)에서 2명의 공민(公民)이 의회에 참석했다. 처음에 그들은 옵서버에 불과했다. 그러나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의회에 모여서 정책에 대한 설명을 듣고 논의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이 작은 출발이 세월과 함께 발전해 오늘날의 대의제 민주주의로 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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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포르의 새 정치 실험 기간은 짧았다. 헨리 3세의 장남 때문이다. 훗날 에드워드 1세(Edward I 1239~1307년, 재위 1272~1307년)가 되는 왕자는 아버지와 달랐다. 왕자에게는 강철 같은 의지와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루이스 전투에서 포로로 사로잡혔던 에드워드는 탈출해 새로운 왕당파 군대를 만들었다. 1265년 8월 4일, 왕의 군대와 몽포르의 군대는 우스터셔(Worcestershire)의 이브샴(Evesham)에서 마주쳤다. 15개월 만에 승자와 패자가 바뀌었다. 에드워드 왕자는 고모부 몽포르의 주특기인 빠른 이동과 강한 압박 전술을 모방해 승리를 쟁취했다.

몽포르는 전사했고, 왕은 권력을 되찾았다. 몽포르의 시신은 이브샴 수도원에 묻혔다. 다행히 몽포르의 정치 실험은 조카 에드워드 1세에 의해 계승됐다. 수도원은 오늘날 꽃이 만발한 공원으로 변했다.

그날의 전투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는 잊히고 현장의 표지석만으로 남았다.

'이곳에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의 유해 일부가 묻혔다. 대의 정부의 개척자로서 1265년 8월 4일 이브샴 전투에서 죽었다.'

기념비는 시몽 드 몽포르 서거 700년을 기려 1965년에 세워졌다. 국민과 신을 대표하는 하원 의장과 캔터베리 대주교가 이 기념비를 봉헌했다. 그가 권좌에 있었던 기간은 짧았지만, 그의 정치적 유산은 긴 세월 자리만 지켰던 수많은 권력자의 그것에 비할 바 아니다. 비록 그는 누구도 찾지 않는 이브샴의 공원에 묻혔지만, 오늘날 운 좋은 일부 사람은 몽포르가 시작한 대의 정부하에서 자유를 누리고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루이스·이브샴=송동훈 문명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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