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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손주 봐주시는 친정엄마, 소녀였던 그녀에게 자유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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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친정엄마의 도움으로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 있다면 오롯이 엄마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갖게 해드리라고 권하고 싶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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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엄마 잡학사전-38] "오늘 수영장 갈래?"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서 한결 여유가 생긴 내게 엄마가 말씀하셨다. 모처럼 미세먼지가 적어 걷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친정 엄마와 수영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가겠다고 했다. 결혼 전엔 주말마다 엄마와 수영장에 다녔다.

수영장엔 엄마와 친하게 지내는 '언니'가 먼저 와 계셨다. 인사를 나눈 뒤 스트레칭을 하고 자유수영을 했다. 5년 만에 수영을 하니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한 바퀴 돌고 헉헉거리고 있을 때 '언니'라는 분이 내게 다가왔다. 아주머니는 우리 엄마가 매일 수영을 거르지 않고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칭찬했다. 지독히도 연습한다고 전하셨다.

엄마는 매일 2시간씩 수영을 하신다. 처음엔 발차기도 못하셨다. 그래도 평일에는 강습을 받고 주말마다 두 시간씩 연습했다. 내가 아이를 낳고부터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자유수영을 하신다. 손주 키우기에 희생(?)당하는 엄마의 유일한 자유시간이다. 직장에 다니는 딸의 아이를 봐주느라 손주 어린이집 등하원은 엄마의 몫이 됐다.

수영장에서 엄마는 더 이상 엄마가 아니었다. 어느 것에도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소녀처럼 보였다. 사람들과 너스레를 떨고 장난을 치는 엄마 모습은 어쩐지 낯설었다. 수영을 마치고 아주머니는 엄마 등에 오일을 발라주었다. 아주머니는 견과류, 나물 등 각종 먹거리를 챙겨주셨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셋이 양재천을 걸었다. 사진을 찍어드리겠다고 하자 아주머니는 엄마에게 립스틱을 건넸다. 화장은 안 하더라도 립스틱은 꼭 바르라고 했다. 두 분이 다정하게 손잡고 꽃길을 걷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엄마는 아주머니에게 연신 "언니는 우리 엄마 같아"라고 말했다. 두 분은 15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난다.

나의 외할머니, 그러니까 우리 엄마의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돌아가셨다. 엄마는 우리가 어리다는 이유로 장례식 때 서울에 남겨뒀다. 그땐 감히 짐작할 수 없었던 슬픔이 물밀 듯 밀려왔다. 엄마도 엄마가 필요했구나, 가슴이 먹먹했다. '언니'와 손잡고 꽃길을 걷는 엄마는 행복해 보였다.

나도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다. 새벽에 라면을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고등학생이었고, 미니스커트를 입어도 춥지 않은 대학생이었고,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청춘이었다. 눈만 마주쳐도 설레는 소녀였고, 물에 손 한 번 담가 보지 않은 여자였다. 출산과 동시에 나는 아줌마가 됐고 24시간 아이들 엄마로 산다. 나는 굳세지고 억척스러워져야 했다.

젊고 아름다웠던 엄마도 그랬을 것이다. 어느 순간 세 아이의 엄마가 됐고, 그렇게 30년 넘게 우리 엄마로만 살았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수영하는 모습이 좋다. 엄마가 유일하게 그녀 자신으로 존재하는 순간이라 더 그렇다.

엄마가 수영을 계속 할 수 있는 한 나는 엄마의 수영 시간을 지켜주고 싶다. 아주머니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친정엄마의 도움으로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 있다면 오롯이 엄마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갖게 해드리라고 권하고 싶다.

[권한울 프리미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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