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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Why] 하일지 교수의 사표와 어떤 얼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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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友야담]

조선일보

어수웅·주말뉴스부장


소설가인 동덕여대 하일지(63) 교수가 사과를 거부하고 사표를 냈습니다. '미투(Me Too)' 2차 가해 논란 5일 만의 일입니다. 그는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을 인용했죠. 소년·소녀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 어휘로 그려낸 고전이지만, 갑(甲)인 마름집 딸 점순이가 을(乙)인 소작농 아들을 유혹했다고 읽는 독법도 있을 겁니다. "처녀인 점순이가 성폭행했으니 얘도 미투해야겠네"가 하 교수의 조롱이었죠.

하 교수의 언행에는 문제가 많아 보입니다. 안희정 전 지사의 비서에 대한 발언도 그렇고, 제자에게 키스했다는 성추행 논란도 직업윤리 위반이자 미달이죠. 하지만 지금쯤은 숨을 한 번 고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미 도서상을 받은 미국 작가 필립 로스(85)의 작품 중에 '휴먼 스테인'이 있습니다. 명망 높은 교수 콜먼 실크가 학생들에게 고발당하죠. 인종차별. 발단은 이렇습니다. 학기가 시작된 지 5주가 다 되도록 강의에 참석하지 않은 학생이 두 명 있었죠. 6주째 콜먼 교수는 출석 부르다 묻습니다. "이 학생들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요. 아니면 유령(spooks)인가요."

spook의 사전적 정의 1번은 '유령'이지만, 4번이나 5번쯤에 '검둥이'라는 뜻이 있답니다. 종적 묘연했던 두 학생은 공교롭게도 흑인이었고, 당시 대학사회에 휘몰아친 인권운동 태풍 아래 콜먼은 모욕과 봉변을 당하죠.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낙인과 얼룩(stain).

그러나 소설은 광풍 뒤에 숨은 진실을 끈질기게 추적합니다. 콜먼의 부모는 흑인이었고,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피부가 검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는 평생 뿌리를 숨기고 백인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하 교수와 콜먼의 사례를 나란히 비교하는 건 공정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죠. 진실은 늘 폭로와 침묵의 양극단 사이에 있고, '미투' 역시 남녀를 서로 적으로 만들자는 취지는 아니라는 것. 남자가 이런 이야기 하려면 용기를 내야 하는 세상이 됐습니다. 하지만 미투 운동의 창시자 타라나 버크의 말처럼, 남자는 여자의 적이 아닙니다.

[어수웅·주말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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