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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세상사는 이야기] `빨간 맛`과 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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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1993년 6월 2일 유엔. 제1차 미·북 고위급 회담. 로버트 갈루치는 북한 대표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상대도 눈치를 챘다. 갈루치가 말을 시작할 때 그 불편함은 손동작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얼굴을 할퀴려는 고양이처럼 강석주는 갈루치를 노려봤다. '그래,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미국 측은 생각했다. 강석주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옆자리 통역에게 물었다 "저 작자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북한 통역에게) "미스터 강은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답니다."(미국 측 통역)

'한반도 운명에 관한 보고서 ' 인용

우여곡절 끝에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는 유보시켰지만 미국에 북한은 늘 수수께끼 같은 나라였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그렇게 나오는데도 체제가 유지되는 나라. 그 경제력에 아무리 들춰봐도 안될 것 같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어떤 날은 호전적이었다가 또 어떤 날은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어 예측하기 어려운 나라. 불확실성을 기막힐 정도로 유리하게 이용하는 나라를 상대로 회담 첫날이 이렇게 적대적이고 거칠게 끝난 게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25년 전 당시 북한의 핵 프로그램 폐기가 목표였던 한반도 상황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협상을 하는가 하면 제재가 이뤄지고, 잠잠한 듯하다가도 불과 몇 주 만에 전쟁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그리고 다시 남·북·미 세 나라가 대화를 시작한다. 25년 전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그때도 북한은 사방에서 조여오는 제재로 고립무원이었다. 중국이 '착한 가격'으로 주던 원유를 빡빡하게 틀어쥐기 시작했고 몇 안되던 무역상대국이 연쇄적으로 돌아섰다. 미국과의 일대 전기가 필요했다. 관계 완화와 국교정상화, 미국이 북한에 핵무기를 쓰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길 원했다. 그런데 정작 미국 내에서는 북한에 대한 의견 정리가 되고 있지 않았다. 정권 교체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 권력은 여기저기 넘쳐났고 너무 많은 부서가 달려들어 국무부 어느 부서가 북핵을 관리해야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았던 거다. 중앙정보국? 이라크의 핵능력을 사전에 탐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걸프전 이후 여론의 질책을 받았던 터, 북한이 한두 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50% 이상"이라고 잘라 말하고 강경파 앞에 섰다. 대다수의 북한 전문가들이 신빙성 없다고 믿었던 이 '섹시한' 추측은 그러나 당시 정치인, 기자, 비평가들에게 전가의 보도처럼 애용됐다.

미국 언론은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북한이 핵을 추가하기 전에 차라리 지금 싸우는 게 낫다"는 기고를 연달아 실었다. 미국인의 전쟁 로망이 된 '사막의 폭풍작전'처럼 '깨끗한 전쟁', 미국인이 죽지 않는 전쟁을 치를 수 있다는 허황된 꿈이 몸집을 키우는 사이 한국군 수십만 명 사망, 민간인까지 100만명을 희생시킬 수 있는 전쟁의 발화점인 패트리엇 미사일이 한반도에 투입됐다. 전쟁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한반도의 운명을 우리가 아닌 남이 쥐고 있던 뼈아픈 힘의 진실이다. 의외의 '카터 변수'로 북핵 파국의 거친 파고가 잠시 숨을 죽였지만 위기일지 기회일지 모를 갈림길에 마주한 건 세월의 몇 바퀴를 돈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수장이 바뀌었다. 흥정을 위해 강하게 밀어붙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몸을 풀고 있다. 그런데 전권을 부여받아야 할 협상 실무자들이 조금이라도 '비둘기스러우면' 그의 밑에서 날지 못한다는 사실이 우려스럽다. 북한도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2400만명의 작은 나라이고, 핵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그들. '너무 쉽게 사랑에 빠져버린, 우린 제일 어울리고 또 멋져.' 빨간 맛 노래를 '보고' 있을 김정은의 머릿속 셈법은 복잡할 것이다.

불타는 건물에서 뛰어내리면 살 확률이 5%라 해도 건물 속에서 죽느니 차라리 뛰어내리겠다고 할 나라가 북한이다. 변한 듯하지만 변하지 않았을 두 나라. 그리고 현실의 접점을 '운전'하며 찾아가는 한국. 5%의 가능성을 놓고 한반도의 운명이 다시 놓인다.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이번만큼은 남의 손이 아닌 우리 손에서 역사가 더 많이 쓰이기를 바란다. 그래야 한다.

[김은혜 MBN 앵커·특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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