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9 (일)

[일사일언] 나의 만년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송미경·동화작가


살다 보면 누구나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 있다. 그때 말문을 열어주는 존재는 가장 오래 옆에 있어준 존재다. 만년필이 내겐 그랬다.

처음 손에 쥐었던 만년필은 묵직하고 잉크의 흐름이 좋았다. 외삼촌은 어린 내게 만년필에 잉크 채우는 법을 알려줬다. 잉크병에 펜촉을 담고 스포이드식 컨버터를 뽁작뽁작 움직여 잉크를 빨아들이면서 나는 만년필에 매료됐다.

사춘기 시절 아버지한테서 만년필을 선물 받으며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됐다. 만년필로 일기를 쓰고 낙서도 했다. 사용을 멈춘 건 이십대 중반 그 만년필을 잃어버리면서다. 아버지의 마지막 선물을 잃었다는 자책감 때문에 더는 쓸 수 없었다. 그 후 종종 주머니나 필통에서 만년필을 꺼내는 사람들을 봤다. 그들은 만년필을 수집하거나 중요한 순간에 쓰기 위해 아껴뒀다. 만년필을 여러 개 가지고 있거나, 고가의 만년필이 있거나, 만년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다시 만년필을 쓰게 된 건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우연히 갖게 된 낡은 만년필을 직접 수리하면서부터다. 특별한 의미도 없고 잃어버려도 그다지 속상할 것 같지 않고 고장이 나도 쉬 고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편히 언제나 그걸 사용했고 곧 정이 붙었다. 수집이나 연구의 대상도 아니고 특별한 상징도 없으며 그리 값나갈 것 같지도 않은 만년필은 나를 좀 더 자유롭게 그리고 싶은 걸 그리고 쓰게 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때 만년필로 낙서를 하다 보면 이야기가 만년필 펜촉에서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편하고 익숙한 도구는 내게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며 나를 도왔고, 나는 정성껏 그걸 사용하고 수리했다. 잉크를 쏟고 펜촉을 고장 내거나 잃고 되찾기를 반복하는 사이 우연히 만났던 그 만년필은 내게, 나는 그 만년필에 길들여졌다.

우리는 찬탄과 상실과 실망을 넘어서며 서로에게 비로소 진짜 친구가 된다. 수고롭지만 경이롭다. 누군가와 혹은 무엇과 친밀하며 유일한 존재가 되는 과정은.



[송미경·동화작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