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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 (일)

[공연 리뷰] 느리게, 숨 막힐 듯 아주 느리게 허공을 가로지르는 환상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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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지젤'

이 무대 위에서 중력은 무의미하다. 발목 위까지 내려오는 순백의 로맨틱 튀튀를 입은 발레리나는 질량 없는 존재처럼 허공 위를 떠다닌다. 산들바람을 타고 춤추듯 흩날리는 흰 꽃잎이나 눈송이를 슬로 모션으로 볼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조선일보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마지막‘그랑 파드되’(2인무). 탐미적이고 환상적인 낭만 발레의 특징을 드러내는 지젤 최고의 장면이다. /이태훈 기자


국립발레단(예술감독 강수진)이 21일부터 낭만 발레의 걸작 '지젤'(안무 파트리스 바르)을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리고 있다. 지젤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뒤 성장과 변신을 거듭하며 여전히 사랑받는 작품. 발레리나의 목에서 어깨를 거쳐 팔로 이어지는, 여성의 가장 아름다운 선(線)을 뜻하는 '지젤 라인'이라는 말이 이 작품에서 비롯됐다. 무용수에겐 표현력을 최대치로 드러낼 수 있는 꿈의 무대이고, 발레 팬은 최고의 기교로 펼쳐지는 그 무대 위 드라마에 사로잡힌다. 밝고 경쾌한 1막에서 지젤은 사랑에 빠진 명랑하고 순박한 시골 소녀였다가 연인 알브레히트의 배신으로 미쳐 가는 비련의 여인이 된다. 어둡고 음산한 2막에서 지젤은 살아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죽어 지켜내는 슬픈 요정이 된다. 무용수들은 그 무대 위에서 이 연인의 운명을 춤으로 지키며 이승과 저승,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무용수들이 저마다 최고의 춤을 뽐내는 1막의 추수 축제 무도회, 밤의 요정 '윌리'가 된 발레리나 24명이 백조처럼 날갯짓하는 2막의 군무(群舞)는 여전히 명장면. 압권은 역시 마지막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그랑 파드되(2인무)다. 윌리의 여왕 미르타는 지젤을 배신한 알브레히트에게 밤새 춤추다 지쳐 죽는 마법을 걸려 하지만, 죽어서 윌리가 된 지젤이 그 앞을 막아선다. 두 연인의 춤은 애절하다. 알브레히트가 지젤을 들어올리면, 새하얀 지젤은 나비가 된 듯 공기를 타고 검은 도화지 같은 허공 위에 자신의 몸으로 희고 우아한 선을 긋는다. 느리게, 숨 막힐 듯 아주 느리게. 지독하게 탐미적인 희고 순수한 선이다. 지젤은 그 아름다운 춤으로 알브레히트의 목숨을 구한다. 춤은 말과 글의 한계를 뛰어넘는 직관적 표현 도구이며, 최적의 방식으로 드러내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것은 사람의 몸이었다. 지젤은 당연해서 잊고 있었던 그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꿈처럼 밤이 지나고 두 연인의 춤도 끝난다. 지젤이 연기처럼 사라질 때, 알브레히트는 지젤 무덤가의 백합을 무대에 뿌리며 객석 정면을 향해 걸어 나온다. 지젤이 음습한 늪을 떠나 무대의 마법에 걸린 관객들 가슴속에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공연은 25일까지.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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