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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전문기자 칼럼] 박인비가 꺾어야 할 마지막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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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첫 우승 뒤 정상 지키며 올림픽 金·그랜드슬램 위업 달성

한국 선수 숙명 같은 早老 딛고 "골프·삶의 균형"으로 長壽하기를

조선일보

민학수 논설위원·스포츠부 차장


"리우올림픽 때 박인비 선수 보며 정말 멋있고 자랑스러웠어요. 박인비 선수 파이팅" "확실히 정상을 보고 온 사람은 뭔가 아우라가 다르다" "10년 더 해서 40세 이후에 은퇴하면 좋겠어요"….

올해 만 서른 살인 박인비가 미국 LPGA투어 파운더스컵에서 우승한 얘기를 담은 어제 본지 기사 '골프 접으려다… 평창 성화 봉송 후 마음 바꿨어요'에 달린 댓글을 읽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역경에 굴하지 않는 분투와 미담을 전하는 글에도 악플이 파고드는 세상이다. 박인비 경기는 안심하고 볼 수 있다는 칭찬부터 건투를 비는 글이 빼곡했다. 박인비는 '파는 뭐고 버디는 뭐냐?'고 묻던 사람들까지 감동하는 '국민 골퍼'가 됐다.

스무 살이던 2008년 US여자오픈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선수가 크고 작은 슬럼프를 이겨내고 10년 후 더 뛰어난 기량으로 계속 정상에 선다는 것은 우리 스포츠계에서 보기 드문 쾌거다.

골든슬램(올림픽 금메달+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이룬 박인비는 지금까지와는 성격이 다른 마지막 상대를 남겨 놓고 있다. 수십 년간 한국 스포츠 선수들을 한숨짓게 하고 조로(早老)로 이끈 괴물과의 싸움이다.

1998년 박세리가 US여자오픈에서 '맨발 투혼'으로 우승한 후 20년 동안 한국 골프는 몰라보게 발전했다. 수많은 '세리 키즈'가 등장해 세계 여자 골프를 지배하고 있다. 박세리는 지옥 훈련으로 유명했고 세리 키즈는 그 뒤를 따랐다. 단기간에 이룬 성공 신화는 부작용도 만만찮았다.

LPGA에서 한국 선수들은 20대 중반까지 반짝하다 사라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면 한국에서 온 어린 선수들이 그 빈자리를 메우는 모습이 되풀이됐다. 이럴 때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이 한국 골프 선수들을 무기력의 수렁에 빠트렸다.

'번아웃 증후군'은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정신적·신체적 피로를 느끼며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어릴 때부터 훈련과 성적에 얽매여 지내는 스포츠 선수들도 이런 증상에 희생되기 쉽다.

대부분 부모 권유로 어린 나이에 운동을 시작한 한국 골프 선수들에게는 피하기 힘든 숙명과도 같다. 지금도 한국 여자 프로골프 투어에서 뛰는 선수 세 명 중 한 명꼴로 이런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귀띔한다. 하지만 운동량이 많고 승부 근성이 강하다고 무조건 이런 증상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박세리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이 대표적이다. LPGA투어 72승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통산 93승을 거둔 그는 '골프 머신'이라던 한국 선수보다 연습량이 더 많았다. 동계 훈련 때면 하루 윗몸일으키기 1000개에 5㎞씩 달렸다. 엄청난 웨이트트레이닝으로 30대엔 근육질로 변모해 있었다.

경기 중에 어른거리는 자기 그림자가 신경 쓰인다고 할 정도로 소심한 면도 많았다. 그런데 그는 서른여덟 살에 은퇴할 때까지 오랜 전성기를 누렸다. 18홀에서 모두 버디를 잡아 54타를 기록하겠다는 '비전 54'가 그의 목표였다. 소렌스탐은 LPGA에서 유일하게 '꿈의 59타'를 기록했지만 요즘 우리 사회의 유행어가 된 '워라밸(워크 앤드 라이프 밸런스·일과 삶의 조화)'의 달인(達人)이기도 했다.

훈련도 지독하게 했지만 TV 요리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취미 생활도 즐겼다. 그의 목표는 주변의 강요나 압박이 아니라 모두 스스로 세운 것이었다.

박인비는 "30대를 시작하는 지점에서 우승을 차지한 게 좋은 신호탄이 된 것 같다. 골프와 삶의 균형을 잘 유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세리가 한국 골프의 신천지를 열었다면, 박인비는 한국 골프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를 바란다.

[민학수 논설위원·스포츠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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