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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화)

[시론]문 대통령의 베트남 국빈방문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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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이번주 베트남 국빈방문을 앞두고 있다. 이번 방문기간 중에 문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관해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경향신문

개인적으로 과거 미국 유학 시절에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폭로한 미국 퀘이커 교도의 보고서를 읽고 그 끔찍한 참상에 전율한 적이 있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는 조사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5000명에서 9000명 정도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군이 저지른 이러한 범죄에 대해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최근 힘을 얻고 있다. 3월 초에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군 민간인 학살 50주기를 맞는 올해가 공식적으로 사과할 수 있는 적기라고 강조한 바 있다. 지난주에는 한국군에 의해 135명이 살해당한 베트남 중부 하미 마을 학살 50주기 위령제를 맞아 한국의 민간인 참배단이 사과 방문하기도 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대통령이 사죄해야 한다는 글이 올라와 많은 국민들이 지지의사를 표명했고, 이부영 전 국회의원도 SNS에 문 대통령이 사죄할 것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국민들의 이러한 공론에 부응해 문 대통령은 사과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의 국가원수로서 베트남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하는 것은 국가 간의 과거사 청산의 모범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최우선적인 의의를 갖는다. 그 외에도 국내외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먼저, 문 대통령의 사과는 역대 권위주의 정권에서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과거사 청산 결의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정부 수립을 전후한 제주 4·3사건과 ‘여순반란’ 등의 진압과정에서, 6·25전쟁 중 보도연맹원과 거창 주민 학살사건 등에서, 그리고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의 유혈진압에서 드러난 것처럼 우리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어두운 역사를 반복해서 겪어야 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6·25전쟁의 종료와 함께 한때 종적을 감춘 것처럼 보였던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1960년대 후반에 베트남 인민을 대상으로 되살아났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베트남에서 재학습된 악행이 1980년에 자국민인 광주 시민을 상대로 적나라하게 재연되었던 것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1980년 신군부의 주역이었던 전두환·노태우·정호용 등은 베트남 전쟁에서 지휘관으로 복무한 경험이 있다. 아울러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무자비한 학살에 앞장섰던 공수부대 부사관들의 상당수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이었다는 증언도 최근 나오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 축적된 민간인 학살 경험이 부메랑이 되어 광주로 돌아온 셈이었다. 이 점에서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국제적인 사죄는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자행된 시민 학살에 대한 사과의 의미도 겸하고 있다.

둘째, 문 대통령의 사죄는 일본 측의 비판에 맞설 수 있는 떳떳한 명분을 마련해 줄 것이다.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외면하고 위안부 문제 등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엄중한 사죄를 요구하는 한국의 입장을 놓고,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는 외면하고 일본의 과오에 대해서만 책임을 추궁하는 것으로서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합당한 비판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셋째, 문 대통령의 사과는 동아시아에서의 평화와 화해 및 번영을 촉진하는 역사적 이정표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이번 방문을 놓고 문 대통령이 태국과 필리핀, 호주 등 여러 나라가 참전국으로 얽혀 있는 외교적 상황을 고려해 근래 사용한 적이 있는 ‘마음의 빚’이란 다소 추상적이고 애매한 표현에 머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이 다른 참전국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잘못된 과거사에 대해 선제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추구하는 것은, 최근 보여준 남북관계에서의 획기적인 진전과 더불어 동아시아에서 평화와 화해를 촉진함에 있어서, 모범적이고 주도적인 한국의 리더십을 부각시키는 훌륭한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과 베트남 관계에서도 사과와 화해를 토대로 형성된 신뢰 구축은 양국 간의 경제협력과 공동번영을 추진하는 데도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 국민들에게 과거 한국군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공식적 사과를 할 것을 촉구한다. 나아가 대한민국 정부는 베트남 국민이 입은 정신적·물질적 피해에 대한 가시적인 배상조치를 불가역적으로 취해야 할 것이다.

<강정인 |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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