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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일상 옥죄는 '몰카 공포'...피해자는 트라우마 시달리는데 처벌은 '솜방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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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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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산하의 한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김은영씨(가명·26)는 지난해 직장 동료로부터 ‘몰래 카메라’ 피해를 입었다. 가해자는 여직원 탈의실에 카메라를 설치했고, 지난해 8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총 9차례에 걸쳐 옷을 갈아 입는 김씨와 또 다른 피해자 박소영씨(가명)의 신체를 몰래 촬영한 혐의로 기소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검찰은 19일 서울시 공무원인 유모씨에게 징역 1년6월을 구형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직장 동료가 자신이 근무복을 갈아입는 시간까지 확인해가며 계획적으로 ‘몰카’를 찍은 범인임을 알게 된 날 이후, 김씨는 업무는 물론 정상적인 일상생활까지 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사건 5개월이 지난 지금도 약을 먹고 있고, 약이 없이는 잠을 잘 못자요. 일하는 공간, 생활하는 공간 곳곳에서 누군가 몰래 나를 찍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에 출근하기도 힘들었습니다.”

피해자들은 병원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고 병가를 내 휴직 중이다. 카메라 발견 직후 자신의 범행임을 인정한 유씨는 현재 대기발령 상태다. 곧 법원 판결이 예정돼 있고 판결에 따라 유씨의 징계 수위도 결정될 예정이지만, 피해자들은 “몰카 범죄자에 대한 솜방망이 식 처벌이 이어진다면 제2, 제3의 피해가 생겨날 것”이라며 “지금도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가 더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상 옥죄는 ‘도촬 공포’

범죄 이후에도 ‘도촬 공포’는 피해자들의 일상을 옥죈다. 출·퇴근길 지하철이나 화장실, 매일 일상을 보내는 일터조차도 ‘안전한 공간’이 아닐 수 있다는 불안감이 고스란히 피해자의 몫으로 전가되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를 말하는 ‘미투(#MeToo)’ 운동이 이어지고 있지만 최근 급증하는 몰카 범죄 등 디지털성폭력 피해자들은 영상물 유포 등에 대한 공포와 이에 따른 2차 피해 우려로 신고조차 쉽지 않아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시 공무원 몰카 사건의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몰카 상습범’이라며 법원에 강한 처벌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여직원 탈의실에서 몰래카메라가 발견되기 약 2달 전인 지난해 7월에도 여자 화장실에서 카메라가 발견됐는데, 당시 당직실 숙직자였던 유씨가 피해자의 신고를 막고 카메라를 파손해 폐기했다는 것이다. 피해자 박씨는 “화장실 좌변기 뒤쪽에서 검은색 소형 카메라를 발견하고 보고하기 위해 유씨에게 카메라를 가져갔지만, (유씨가) ‘이 사실이 알려지면 직원들도 내부 고발자라고 욕을 할 것이고 직장생활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결국 신고한 여자만 손해다’라면서 신고를 못하게 하고 그 자리에서 카메라를 망치로 부쉈다”고 말했다. 박씨는 “당시에는 그가 몰카범일 것이라고 생각조차 못했지만, 두 달 뒤 탈의실 몰카 범행이 드러난 뒤에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화장실 몰카는 벽에 부착하기 위한 테이프가 접착력을 잃고 떨어진 상태로 발견됐는데, 두 달 후 탈의실에서는 마치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인듯 빨판 모양의 거치대가 부착돼 있었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경찰에 7월 말 발생한 몰카 사건도 증거물을 확보해 수사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경찰이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피의자의 자택을 수색했을 때에는 이미 피해자들이 ‘유력한 증거물’이라고 지목한 노트북과 SD카드 등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현행범이 아닌 이상 절차에 따라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고 집행하는데 일정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지만, 영상물 유포 우려가 큰 몰카 범죄에 있어서는 초동 수사기관의 발 빠른 대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호영 법무법인 삼율 대표변호사는 “‘설치형 몰카’ 사건인 경우 현행범 체포가 어렵다면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인지했을 때 긴급체포해 증거인멸의 시간을 주면 안 된다”면서 “몰카 범죄는 초동수사가 부실하면 증거인멸로 가해자가 법망을 피해가거나 영상물 유포로 걷잡을 수 없는 피해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씨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화장실 몰카’ 사건은 자신의 소행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급증하는 몰카 범죄, ‘솜방망이’ 처벌 논란

피해자들이 수사기관과 재판부에 ‘상습 범죄’임을 밝혀 달라고 요구하는 이유는 그간 사법부가 유사한 몰카 사건에서 초범이라는 이유 등으로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대법원 자료를 보면, ‘카메라 등 이용 촬영(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으로 기소돼 재판에 넘겨진 이들 가운데 1심에서 벌금형이나 집행유예 등으로 풀려난 비율은 2016년 기준 10명 중 9명(86%)에 달했다. 현행 성폭력처벌법은 몰카 범죄를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는데, 범죄의 심각성에 비해 수사 단계에서 구속되는 사례는 드문 데다 검찰의 구형 역시 벌금이나 1년 이하의 징역이 대다수라 재판에서도 절반 이상이 벌금형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제주지법 역시 여자친구와의 성관계 장면을 몰래 찍은 20대 남성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는 등 ‘초범이고 잘못을 반성한다’는 이유 등으로 선처하는 사례도 빈번한 실정이다.

정부는 지난해 9월 몰카 등 ‘디지털성범죄 피해 방지 종합대책’을 발표하며 상습적으로 몰카 영상을 촬영·유포하는 자는 원칙적으로 구속수사하고 공무원이 몰카 관련 성범죄를 저지르면 공직에서 배제하는 ‘디지털 성범죄 공무원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도입한다고 밝혔지만, 상습적인 몰카 범죄에 대해서도 여전히 ‘솜방망이 식’ 처벌이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 1월 인천지법은 지하철역과 빌딩 공용화장실에서 상습적으로 몰카 범죄를 저지른 30대 남성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 남성의 몰카 범죄로 확인된 피해자만 104명에 달했지만 구속은 피한 것이다.

이는 직장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7월 서울 동부지법에서 근무하던 현직 판사가 지하철에서 휴대전화로 여성의 신체를 몰래 찍어 체포됐지만 정식 재판에 넘겨지지 않고 약식기소돼 벌금 300만원 처분을 받았고, 이후 대법원 역시 이 판사에게 감봉 4개월의 징계처분을 내린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일었다.

초소형, 위장형 카메라의 진화 등으로 최근 몇년새 몰카 범죄는 급증하는 추세다. 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적발된 전체 성범죄는 2012년 2만2933건에서 2016년 2만8993건으로 연평균 6.0% 증가했지만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 범죄는 연 평균 21.2% 급증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지난해 10월 공개한 ‘한국의 범죄현상과 형사정책’ 자료를 봐도 2015년 기준 성범죄 4건 중 1건(24.9%)이 몰래 카메라를 이용한 촬영 범죄인 것으로 나타났다. 몰카 범죄는 강제추행(42.7%)보다 비중은 적었지만 2008년 535건에서 2015년 7730건으로 7년새 13.2배 가까이 증가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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