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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매경이 만난 사람] 최대 의료생활사 박물관 운영 이길여 가천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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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인천시 옥련동 가천박물관에서 만난 이길여 가천대 총장은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한국 의학사를 조명하는 박물관으로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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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여 가천대 총장(가천길재단 회장)의 인정(人情)은 그칠 줄 모른다. 바람이 강할수록 더 세차게 도는 '바람개비' 같다. 이는 그가 평생 지켜온 삶의 모토이자 상징이 됐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다친 길고양이와 들개를 집에 데려와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산부인과 의사가 된 후에는 돈 없는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줬다. 그가 설립한 가천의대는 6년간 전액 장학금과 기숙사 제공으로 가난한 학생도 의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놨다. 그러자 오갈 데 없는 고서(古書)까지 몰려들었다. 결국 그는 이 유물들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장고를 짓기 위해 노후를 보낼 인천시 옥련동 집터 1만3200㎡(4000평)까지 기부했다. 1995년 그 자리에 개관한 가천박물관은 고서 1만1200여 권과 잡지 창간호 2만200여 권, 한국 근현대 의료기구 등 총자료 6만4000여 점을 보관하고 있는 국내 최대 의료생활사 박물관. 인천 유일의 국보인 '국보 제276호 초조본유가사지론 권제53'을 비롯해 보물 15점, 인천시 유형문화재 3점 등을 소장하고 있다.

인천 청량산을 등지고 송도 바다를 바라보는 가천박물관에서 만난 이 총장은 "수장고가 모자라서 앞으로 시설을 증축하는 공사를 진행한다"며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한국 의학사를 조명하는 박물관으로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고서와의 인연은 197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간다. 어느 날 한 고서점 사장이 찾아와 전시회 비용 3000만원을 지원해 달라고 간청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책을 보관하기 어려운 사람이 많으니 전시회를 통해 팔고 남은 책을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총장은 그후로도 3년 동안 고서 전시회를 후원하면서 기증받은 고서를 병원 창고에 보관했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전국 곳곳에서 고서 기증자들이 몰려들어 이내 창고가 가득 찼다. 그중에서 국보를 비롯한 국가지정문화재까지 나왔다.

―노후를 보낼 집터에 박물관을 짓기로 마음먹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동학운동을 하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까운 책들을 다 불태워 안타까웠던 터라 남의 책이라도 잘 보관해주고 싶었어요. 그동안 병원 창고에 쌓인 고서가 너무 많아서 아직도 정리 작업 중이에요.

딸만 둘을 낳아 평생 타박당하면서도 자식을 당당하게 키워준 어머니에 대한 추억도 박물관 건립의 배경이죠.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는 재봉틀을 사서 두 딸의 옷을 지었어요. 그 당시에만 해도 자급자족이었죠. 목화와 누에에서 실을 빼서 옷을 짓고 손수건 수(繡)까지 아낙네들이 놓았어요. 그런데 내가 존경하고 사랑한 어머니 시대의 솜씨가 사라지는 게 안타까웠어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경북 안동 지삿갓, 강원도 영동 눈 짚신, 충남 한산 모시를 만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모셔 솜씨 자랑 자리를 마련해 드렸어요. 그만 만들겠다는 분들을 설득해서 전통을 이어가도록 노력했지요.

―인천 소재 국가지정문화재의 50% 이상이 이곳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현재 인천에는 국보와 보물 28점이 있어요. 저희 박물관에 15점이 있으니 인천 국보와 보물의 53%가 있는 셈이지요. 인천 유일의 국보 '초조본유가사지론 권제53'은 우리나라 최초 대장경인 초조대장경 가운데 유가사지론 100권 중 53권째 해당하는 책이에요. 초조대장경 경판은 고려 현종 2년(1011)에 거란군이 개경을 침범하자 부처님의 가호로 물리치기 위해 새기기 시작했다고 해요.

―인천·경기 지역에서 가장 많은 고서를 소장하고 있다던데요.

▷네, 맞아요. 의서 900여 점에 유학 관련 서적, 문집, 교지와 같은 고문서가 있어요. 학술 연구 발전을 위해 저희가 소장하고 있는 고서 목록집을 발간해 배포할 계획입니다.

―1908년 근대 잡지 효시 '소년' 창간호를 비롯해 한국 최대 창간호를 소장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1996년 한 창간호 수집가에게서 창간호 4000여 점을 기증받았어요. 그때 이미 한국기네스에 등재돼 있었지요. 그 이후로도 계속 창간호를 수집하고 기증받아 현재 2만200여 점을 소장하게 됐어요. 3년 전에는 '책의 수도 인천' 지정을 기념해 한국 창간호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전시도 개최했습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기획전을 열어왔는데 손에 꼽을 만한 전시를 소개한다면요.

▷2008년 가천 길의료재단 설립 50주년을 맞은 해에 특별 전시를 열었어요. 가천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보물, 유물을 엄선했는데 인천의 문화적 역량을 한 단계 올려놓은 전시라는 호평을 받았어요. 올해 60주년을 맞이해 특별전을 개최할 계획입니다.

―박물관을 무료 개방하고 있는데 운영 재원 마련에 어려움은 없나요.

▷처음에는 사재로 운영하다가 지금은 가천문화재단에서 관리 운영해요. 자원봉사하는 분도 있고 박물관 직원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정말 많은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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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茶道)와 공연 등 문화예술계 지원에도 열정적인데요.

▷그동안 인천 시민의 건강을 위해 몸이 부서지게 일했어요. 저도 나이 먹고 병원도 커지니까 인천 시민의 정신적 건강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인천이 항구도시라 문화예술이 약해요. 내가 젊었을 때는 극장도 많았고 음악회도 활발했는데…. 돌아가신 언니(고 이귀례 한국차문화협회 명예이사장)가 서구 커피에 맞서 차(茶) 문화 보급 운동을 하는 걸 도왔어요. 나도 한복 입고 띠를 두르고 종로1가에서 4가까지 행진하면서 '우리 차를 마시자'는 캠페인을 했어요. 그때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1901~1989)도 동참했지요. 언니는 전국 학생 20만여 명에게 다도를 가르치고 외국을 돌아다니면서 한국 차문화를 알렸어요. 어렸을 때 할아버지 사랑방에 동학 운동가들이 모였을 때 차를 내놓은 기억이 난다면서요. (이 총장은 한국차문화협회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규방다례보존회를 후원하고 있다).

―1999년 심청 효행상은 어떤 사연으로 제정했나요.

▷제 가슴을 아프게 했던 백령도 환자들 때문이에요. 섬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오는 동안 과다출혈로 맥이 안 짚이는 산모가 많았지요. 그래서 1995년 적자를 감수하면서 백령도에 길병원을 운영했어요. 6년간 매년 4억~5억원 손해를 감수하다가 결국 2001년 인천시로 넘겼지요. 백령도에 가니까 심청(고전소설)이 바로 인근 장산곶에서 태어났더군요. 심청이 빠져 죽은 인당수도 있고 연꽃을 타고 떠오른 연화봉도 있고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심청의 심성을 가지면 좋을 것 같아서 심청 동상을 만들어주고 심청상을 만들었지요.

―요즘 젊은이들은 아이를 안 낳으려고 하는데, 산부인과 의사로서 걱정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아기를 낳고 편하게 키워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안 낳죠. 이어령 선생님이 아이디어를 줘서 세살마을(서울시와 경기도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육아공동체)을 운영하고 있어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태아에서부터 세 살까지가 굉장히 중요한 때인데 우리가 놓치고 있죠. 영유아 교육 문제를 해결하고 출산 장려 운동을 하고 있어요. 국가가 마음 놓고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총장님은 결혼을 하지 않으셨지요.

▷병원이 너무 바빠서 결혼을 못한 거지요. 나와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해요. 누가 뭐라고 해서가 아니라 응급 환자가 있으니 잘 수 없고 밥을 못 먹었죠. 병원이 커지면서 의료인으로서 책임감은 더 강해졌어요. 한국 의료 발전을 위해 미국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죠. 그게 나의 소명이고 그 때문에 태어났다고 믿었어요. 모범생이라서 결혼을 못 한 것 같아요. 하하. 결혼은 못 했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행복한 인생이죠. 가천대 학생들과 병원·학교 직원들 3만여 명이 다 내 자식 같아요.

■ "이길여 같은 의사 돼라"…자신있게 말할수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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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에 대한 사랑이 유난하다는데요.

▷2008년에야 처음 하와이에 갔어요. 2주일 동안 골프 치고 섬들을 돌아보니까 '이게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와이키키 해변 호텔을 인수해 2012년 기숙사형 어학 연수 캠프 '가천글로벌센터'를 오픈했어요. 최장 15주일 동안 학비와 기숙사비, 왕복 항공료를 지원해 지금까지 학생 1200여 명이 혜택을 받았죠.

―2012년 경원대와 경원전문대, 가천길대, 가천의대를 통합한 후 학교 이미지가 더 좋아졌는데, 비결이 무엇인가요.

▷4개 대학 통합은 사실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에요. 다들 불가능하다고 한 일을 해낸 거죠. 직접 다니면서 교수 400여 명을 뽑았죠.

―그래서 '여자 정주영(현대그룹 창업주)'으로 불리나요.

▷해야 하는데 안 하는 것은 무책임한 겁니다. 선의(善意)와 빠른 결단, 추진력이 합쳐져 좋은 결과물이 나옵니다.

―가슴에 품어 따뜻하게 덥힌 청진기, 산부인과 최초 미역국도 선의에서 나왔죠.

▷환자를 위한 의사 마음이 나 같은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학생들에게도 "나 같은 의사가 돼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나 같은 의사를 만들기 위해 가천의대를 설립했고요.

―2년간 인공지능(AI) 의사 '왓슨' 시스템을 운영했는데, 어느 정도 기술인가요.

▷대장암을 제일 잘 진단하고 유방암, 폐암도 잘해요.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의사는 오진율이 있죠. 환자에 대한 모든 자료를 왓슨에 입력하면 8~10초 사이에 진단해요. 다만 왓슨에만 의존할 수 없고 환자와 여러 의사가 함께 진단해야 합니다.

―목에 주름이 거의 없을 정도로 피부가 좋은데,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즐거운 일이 많으니까 엔도르핀이 막 나옵니다. 나이를 먹는 것은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저께 몰랐던 사람을 오늘 만나 새로운 것을 배웁니다. 하루하루 배움이 쌓여 즐겁지요.

―인생에서 아쉬운 게 있다면요.

▷젊었을 때 연애도 할 걸,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운동도 좀 더 할 걸 아쉬워요. 너무 모범생으로만 살다 보니 자제하는 게 많았지요. 지난 추석 연휴에는 9일 동안 골프를 쳤어요. 젊어서 못 쳐서 한이 돼서 그래요.

■ 이길여 총장은…

△1932년 전북 옥구 출생 △1957년 서울대 의과대 졸업 △1958년 인천 자성의원(이길여 산부인과 전신) 개원 △1965년 미국 메리 이머큘리트 병원 인턴 수료 △1968년 미국 퀸스종합병원 레지던트 수료 △1977년 일본 니혼대 의학 박사 △1978년 의료법인 인천길병원 설립 △1991년 가천문화재단 설립 △1995년 가천박물관 개관 △1998년 가천의대 개교·경원대 인수 △1999년 경인일보 회장 △2002년 가천길재단 회장 △2012년 가천대 총장

[대담 = 김주영 문화부장 / 정리 =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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