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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태평로] 어느 음식점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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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左派'는 곳곳에서 진보 담론 만드는 조찬 회동

집권 측 暴走 막을 '넥스트 라이트'는 어디에

조선일보

이하원 논설위원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겸해서 서울 한복판의 성공회 대성당을 자주 가로질러 다니고 있다. 그때마다 성당 바로 옆 D식당을 지나친다. 2012년 대통령 선거 직전 문재인·안철수의 단일화 회동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식사하며 회의하기 편하게 만들어져 조찬(朝餐) 모임이 많은 게 특징이다.

출근길에 이곳을 지나갈 때 인사하게 되거나 목격하는 이는 영락없이 진보 측 인사일 경우가 많다. 어쩌다 이곳에 약속이 있어 가게 되면 '평화' '한반도'를 앞에 내건 단체의 인사를 주로 보게 된다. 얼마 전 진보 진영 담론(談論)을 부지런히 생산해내는 P 교수도 여기서 만났다. 그는 "요즘 청와대 사람들 일하는 게 시원찮아 싫은 소리를 좀 했다"며 웃었다. 두꺼운 안경테 뒤편의 얼굴엔 현 집권 세력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진보 측의 각종 모임과 세미나가 열리는 곳은 이곳만이 아니다. 한국의 주요 정당이 모두 모인 여의도에서 조찬 회동을 가장 많이 하는 집단이 여당이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청와대 근처와 신촌에서도 비슷한 모임이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이 때문일까. 진보 측 인사들을 만나면 '공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지향점에 대해선 동의하기 어렵지만 열정만큼은 인정할 때가 적지 않다.

좌파는 이런 모임을 통해 국민에게 던질 담론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2001년 하반기로 기억한다. 민주당은 10·25 재보선에서 3곳 모두 한나라당에 내주며 참패했다. '차기 대통령은 이회창'이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초·재선 중심의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이 일어섰다. '새벽 21' '바른정치모임' 을 만들어 동교동계라는 공룡을 들이받았다. 이들은 거의 매일 아침 7시쯤 만나 전략을 가다듬고 논리를 다졌다. 그 후에 '당 쇄신 특별대책위' 회의에 들어가 동교동계와 치열하게 싸웠다. 저녁엔 세(勢)를 확산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이런 싸움을 1~2주 한 게 아니다. 거의 두 달간 진행됐다.

취재하던 기자들도 덩달아 자정 무렵에 집에 들어가고 새벽에 나와야 했다. 그 결과 2002년 1월 초 '국민 참여 경선제'로 대통령 후보를 뽑는 방안이 민주당 당론으로 채택됐다. 50일 동안 전국을 돌며 선거인단 7만명이 대통령 후보를 뽑는 방식은 당시로선 획기적이었다. '노무현 바람'의 시작이었다. 국민 참여 경선제는 여러 폐단이 있었지만, 한나라당으로 쏠리던 여론 흐름을 막아 세웠다. 소장파는 치열한 '조찬 투쟁'을 통해 '국민 참여'라는 시대정신을 선점했다. 요즘엔 좌파의 소규모 회의를 통한 담론 생산→콘서트라는 이름으로 대중 강연→결과물을 인터넷과 책으로 확산시키는 구조가 자리 잡았다.

6·13 지방선거가 석 달도 남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우파는 누가 시대를 관통하는 담론을 만들고 있나. 집권 측은 정치에서는 남북 정상회담과 개헌을 대한민국이 달려갈 철로(鐵路) 삼아 폭주할 태세다. 경제에서도 '최저임금·비정규직·탈원전' 종합 세트로 기존 토대를 허물고 있지만, 우파에선 어떤 의미 있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10여년 전, 노무현 정부의 좌회전이 심해졌을 때 뉴라이트(신보수) 운동이 일어났다. 뉴라이트 주도 세력은 대한민국 정통성과 한미 동맹 중시 담론을 퍼트려 좌파 정권의 재집권을 막는 데 일조했다. 지금 뉴라이트를 능가하는 '넥스트 라이트(Next Right)'를 바라는 것은 무망(無望)한 일인가.

[이하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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