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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런던에서 온 편지] 34.스파이 암살공격에 영·러 'tit for tat'..그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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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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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이데일리 이민정 통신원] 얼마 전 영국에서 발생한 러시아 출신 이중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66)과 그의 딸이 당한 신경작용제 공격의 배후로 러시아 당국이 지목되고 있습니다.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는 조사 결과 스크리팔 부녀에게 쓰인 신경작용제가 1970~1980년대 러시아가 개발한 화학무기인 점을 들어 러시아 당국, 즉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직접 스크리팔 암살을 지시했거나 아니면 러시아 정부가 화학무기 통제에 실패해 이 신경작용제가 암살자의 손에 들어갔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후 러시아 측에 이 상황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고, 러시아가 거부하자 영국 내 들어와 있던 러시아 외교관 추방, 영국 입국 러시아인에 대한 검색 강화 등 일련의 제재를 단행했죠. 이에 대해 러시아도 러시아 주재 영국 외교관 추방 등으로 맞받아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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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외교관 추방 규모 등을 고려했을 때 러시아에 대해 높은 수위의 제재를 단행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지금까지 영국이 내놓은 제재는 러시아 당국에 크게 타격을 줄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습니다.

이제 관심은 영국 정부가 과연 푸틴의 측근으로 분류되면서 금융, 부동산 등 영국 경제산업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러시아 올리가르히(신흥 재벌)를 제재 타킷으로 삼을지 여부에 쏠려있습니다.

측근을 옥죄면 푸틴도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예상에 근거한 시나리오죠.

러시아에서 사업에 성공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푸틴과의 사이가 돈독해야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업에 성공해 신흥재벌로 올라선 이들은 푸틴과 자금거래 등에서 관계가 있는 인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들 러시아 신흥 재벌들이 사업이나 재산을 확장하기 위해 가장 먼저 눈을 돌리는 서방 국가 가운데 한 곳으로 영국이 꼽힙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영국 런던까지는 비행기로 약 4시간이면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고 영국령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돈을 출처나 신분을 밝히지 않고도 전통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투자처로 알려진 런던 부동산을 손쉽게 사들이거나(동시에 돈세탁도 하고), 영국 내 금융 시장 등에 투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푸틴과 관계가 깊은 러시아인이 소유한 영국 부동산 규모는 알려진 것만해도 11억파운드(약 1조6405억원)에 달합니다. 대부분 런던에 집중돼 있고요.

합법적으로 돈을 번 러시아 재벌들도 있겠지만 각종 범죄행위 등을 통한 불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불린 러시아 재벌들도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번 스크리팔 사건을 계기로 영국 당국이 푸틴과 연관성 높은 러시아 기업인이나 정치인이 영국 내 자산 구입에 쓴 돈의 출처를 꼼꼼히 따져서 불법적인 방식으로 축적한 돈으로 영국 내 자산을 사들인 경우 자산을 동결하거나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영국이 러시아 부호들의 자금 동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러시아 자금의 영국 내 투자, 러시아 기업인들과 영국 기업과의 협력 관계, 러시아 자금이 런던 부동산 가격을 지지해 매력적인 투자처로 만드는데 기여한 것 등을 고려하면 러시아 자금을 막는 것은 자칫 영국 경제에 타격을 입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합병한 이후 당시 영국이 회원국으로 있던 유럽연합(EU)이 러시아 개인과 기업에 대한 전방위 제재를 강구하고 있을 때 보수당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이끌고 있던 영국 정부가 장관회의 이후 작성한 문건에는 EU 제재에서 영국의 금융 섹터는 예외로 해야한다는데 의견이 모아진 것으로 향후 문건이 노출되면서 드러났죠.

즉 러시아 관리에 대한 비자 허용이나 여행 금지 등을 하는 EU 제재에는 동의하지만 런던 금융섹터는 러시아 제재로 인한 타격을 받지 않도록 러시아인들의 자유로운 접근을 계속 허용해 이들의 거래로 런던 금융섹터와 회계, 법률서비스 등 관련 전문 서비스 산업이 벌어들이는 수익도 계속 유지되도록 해야한다는 것이었죠.

영국 노동당이 이후 특정 러시아인의 영국 입국을 거부하거나 그들의 영국 내 자산을 동결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추진해왔지만 보수당은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기술적인 문제’를 들어 거부했습니다.

결국 2006년 영국으로 망명와 살고 있었던 러시아 전직 스파이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독살, 2014년 크림반도 강제합병 등 러시아 당국의 노골적인 영국 국내외 안보 위협에 대한 영국 정부의 대응은 맞대응은 하되 집권 정당이나 영국 경제에는 피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제재 수준에서 그쳤습니다. 이번 스크리팔 사건을 두고도 영국 경제에 역풍을 불러올 만큼의 강력한 러시아 제재는 단행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영국과 러시아 관계를 봐야한다는 제언도 있습니다.

2004~2008년 러시아 주재 영국 대사를 지낸 토니 브렌튼은 가디언 기고에서 “러시아는 주요 핵보유국 중 한 곳이자 시리아, 이란, 이슬람 극단주의 문제, 군비 규제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는 국가”라며 “이번 스크리팔 사태에 대해 강력히 대응하되 동시에 테러리즘 예방 등 러시아와 무너진 관계 회복을 위한 협력 가능한 부분을 찾는 노력도 해야한다”고 조언했습니다. 그는 “러시아와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적대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스크리팔 사건 같은 일을 예방하는데 효과적일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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