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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성폭력, 사제·친족 관계에서 2차 가해·후유증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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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235명 사례 분석 논문…신뢰·친밀도와 정비례

피해 사실 의심하고 가해자 옹호 ‘성폭력 통념’ 탓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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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에 의한 성폭력보다 친밀하거나 신뢰하는 관계에서 발생한 성폭력이 피해자에게 더 큰 후유증을 남긴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주변에서 피해 사실을 의심하는 등 ‘성폭력 통념’이 2차 가해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피해자 주변에서 왜곡된 통념을 생산해내는 남성중심적 사회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8일 추지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전문연구원과 권인숙 한국여성정책연구원장의 논문 ‘가해자와의 관계가 피해자의 성폭력 후유증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 성폭력 피해 여성 235명의 피해 사실과 성폭력 통념 경험 등을 분석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이 나왔다.

논문에 따르면 교수·제자 사이와 같은 신뢰 관계나 친족 등 친밀한 관계에서 성폭력이 발생할 경우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피해 사실을 의심하고 가해자를 옹호하는 내용의 ‘성폭력 통념’이 작동해 피해자에게 우울증 등 더 큰 후유증을 남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에 응한 피해 여성들은 친밀한 사이일수록 ‘피해자가 예민해서 피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둘이 좋아서 했는데 피해자가 앙심을 품고 거짓말을 한다’는 식의 피해 사실을 부정하는 소문 등으로 우울증 등 성폭력 후유증을 겪은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성폭행을 당한 여자의 몸은 더럽혀진 것’ ‘여자가 야한 옷차림으로 남성의 성충동을 유발했다’ 등의 통념은 피해자가 스스로를 탓하는 ‘자기 비난’에 빠지게 만든 것으로 분석됐다.

이에 대해 논문은 “성폭력 통념은 그 자체로는 허구에 불과하지만 성폭력 후유증을 배가시키는 매개체로 작동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최근 교수·선배 등 신뢰하는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폭로가 이어지면서 피해자 주변에서 성폭력 사실을 부정하는 소문이 나도는 등 2차 가해가 벌어지고 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를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으로 고소한 전 정무비서 김지은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아무것도 거절할 수 없었다. (머뭇거리고 어렵다고 밝힌 것이) 내 의지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다”고 말했지만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동의하에 이뤄진 성관계이며, 뒤늦게 김씨가 폭로에 나선 것은 정치적 의도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참다 못한 김씨는 2차 피해로 인한 고통을 공개 편지를 통해 호소하기도 했다.

친족 간의 성폭행이 피해자에게 큰 후유증을 남기는 것도 통념이 작동한 결과다. 이날 ‘미투 대나무숲’ 페이스북에서 중학생 시절 친할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힌 한 누리꾼은 “엄마에게 (피해 사실을) 말했더니 돌아오는 말은 ‘엄마도 어릴 적에 할아버지가 가슴을 만졌다’는 말이었다”고 했다. 가족 사이에서 피해 사실을 문제 삼지 않고 피해 사실을 부정하는 통념이 작동한 사례다.

친족 성범죄는 신고율이 집계조차 어려울 정도로 낮아 드러나지 않은 범죄의 비율이 높은 범죄로 알려져 있다.

추 연구원은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정부의 성폭력 정책은 낯선 사람에 의한 성폭력을 처벌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정작 피해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상적인 성폭력,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비난을 가중시키는 잘못된 통념”이라며 “정부 정책 방향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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