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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알쓸로얄] 트레이너와 결혼한 스웨덴 공주, ‘육아 휴직’도 부부가 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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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패럴림픽 참석차 내한한 빅토리아 왕세녀의 '평범한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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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9일(현지시간) 세기의 결혼식에 앞서 스웨덴 스톡홀름시내에서 마차를 탄 채 지나가며 손을 흔드는 왕세녀 빅토리아와 남편 다니엘. [사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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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강원도 평창 패럴림픽 크로스컨트리 스키 남자 시각장애 경기에서 스웨덴 세바스티안 모딘 선수가 은메달을 따자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한 여인이 카메라에 포착됐습니다. 현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의 맏딸 빅토리아(41) 왕세녀입니다. 빅토리아 왕세녀는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 집행위원으로서 내한해 선수단을 격려하고 응원했습니다.

스웨덴은 부계 중심의 왕위 계승을 이어왔지만 1979년 ‘성별중립적’인 왕위 계승이 확립되면서 맏딸 빅토리아가 두 살 터울 남동생 칼 필립 왕자를 제치고 1980년 왕세녀로 책봉됐습니다. 이변이 없는 한 빅토리아는 1720년 이래 처음으로 스웨덴의 여왕이 될 것입니다. [알쓸로얄-고 보면 모 있는 로얄 이야기]가 오늘은 국민과 친근한 입헌군주국 스웨덴의 왕실을 들여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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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 패럴림픽 참석차 내한한 스웨덴 빅토리아 왕세녀가 지난 14일 크로스컨트리스키 남자 1.5㎞ 스프린트 클래식 시각장애 경기에서 은메달을 딴 세바스티안 모딘 선수와 함께 환호하고 있다. [사진 스웨덴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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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영미 열풍’을 불러일으킨 여자 컬링 대표팀 ‘팀 킴’이 세계 최강 스웨덴과 금메달을 놓고 맞붙은 결승전. 지난 2월25일 TV 중계화면은 관중석에 패딩점퍼를 입은 한 노인을 연신 비추었습니다. 여느 스웨덴 응원단과 나란히 경기를 지켜본 이 노인은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였습니다. 그는 이후 다른 경기에서도 점퍼에 니트 모자 차림으로 고함을 치며 응원했고 선수들과 친근하게 기념사진을 찍곤 했습니다. 소탈하고 탈권위적인 스웨덴 왕실의 현재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이지요.

스웨덴은 970년 첫 왕국이 수립된 이래 천년 동안 왕실이 이어졌고 19세기 초 헌법에 의해 입헌군주제를 단계적으로 도입했습니다. 1973년 즉위한 칼 구스타프 16세는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가의 일곱 번째 왕입니다. 이듬해인 74년 새로운 정부조직법이 제정되면서 국왕의 정치불간섭이 명문화됐고 실질적 권리를 모두 의회로 넘긴 국왕은 이후 철저히 상징적인 존재로서 역할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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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강릉 컬링센터에서 열린 여자 컬링 결승전에서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뒷줄 가운데)이 자국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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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당시 구스타프 16세는 27세로 미혼이었습니다. 그는 왕세자 시절인 1972년 독일 뮌헨올림픽에 갔다가 3살 연상의 ‘평민’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당시 통역·수행을 맡았던 실비아 조머라트입니다. 실비아는 독일인 아버지와 브라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항공사 스튜어디스를 거쳐 뮌헨의 아르헨티나 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중이었습니다. 둘이 사귈 때만 해도 스웨덴 왕실엔 평민과 결혼하면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는 규범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74년 국왕의 실질적 권위를 모두 앗아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어도 왕비가 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 겁니다. 구스타프 16세는 76년 실비아와 웨딩마치를 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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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와 실비아 조머라트와의 결혼식 모습.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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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구스타프 16세의 1남2녀 모두가 평민과 결혼했습니다. 그 중 차기 국왕 자리를 찜한 빅토리아 공주는 2010년 헬스 트레이너 출신 다니엘 베스틀링과 결혼해 세계적 화제가 됐습니다. 칼 필립 왕자도 2015년 글래머 모델 출신인 소피아 헬키브스트와 결혼했고 차녀 마들렌 공주도 2013년 영국 태생의 미국인 금융인 크리스토퍼 오닐과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영국 윌리엄 왕세손이 케이트 미들턴과, 해리 왕자가 배우 출신 메건 마클과 결혼하면서 영국 왕족과 평민과의 러브스토리가 주목받았지만 왕실의 혼인 격식 파괴는 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왕실이 훨씬 앞선다고 하겠습니다.

빅토리아 왕세녀와 결혼 때 다니엘은 체육관을 경영하는 사업가로 소개됐지만 이는 몇 년에 걸친 ‘신분 세탁’ 결과였습니다. 외신에 따르면 빅토리아와 다니엘은 2002년 스웨덴의 작은 마을 오켈보의 한 체육관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두 사람의 교제가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평범한 중산층 가정 출신에다 야구모자를 즐겨쓰고 다니고 구수한 시골 사투리를 쓰는 다니엘을 두고 조롱했습니다. 국왕도 그가 차기 여왕이 될 딸의 배필로 맞지 않다고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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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빅토리아 왕세녀와 2010년 세기의 결혼을 올린 다니엘. 왼쪽은 왕세녀와 만나기 전 야구모자를 쓰고 다니던 평범한 헬스트레이너 시절 모습.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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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빅토리아가 고집을 꺾지 않자 국왕은 결국 교제를 허락합니다. 대신 그를 왕실 가족으로 만들기 위한 훈련에 착수했습니다. 머리를 짧게 깎고 전문 스타일리스트를 붙여 옷맵시를 다듬어줬습니다. 다니엘은 영어·프랑스어·독일어를 익히고 역사·정치학을 공부하는 등 교육을 받아 귀공자로 거듭났습니다. 2010년 각국 왕족을 포함해 수천명의 하객이 참석하고 수만명의 관중이 지켜본 두 사람의 결혼식은 ‘찰스-다이애나’ 이후 최대 규모의 ‘세기의 결혼’으로 회자됐습니다. 눈물 어린 성혼 서약과 함께 다니엘은 바스테르고틀랜드 공작이라는 작호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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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왕세녀 빅토리아는 1990년대 중반 한동안 섭식장애를 겪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이후 인터뷰와 책을 통해 "당시엔 번민이 많았다. 내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통제하는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사진 인스타그램]


빅토리아는 어쩌다가 헬스 트레이너와 사랑에 빠진 걸까요. 이면엔 공주의 건강 문제가 있습니다. 빅토리아는 1996년 왕실 행사 때 예전과 달리 깡마른 모습으로 카메라에 포착돼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불렀습니다. 이후 그가 섭식장애를 겪는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졌고 공주는 주변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한 나머지 스웨덴 국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미국 예일대로 진학했습니다. 미국에서 본격적인 치료와 운동을 한 뒤 귀국 후에도 꾸준히 건강 관리를 했고 이 과정에서 다니엘을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빅토리아는 이후 공식 인터뷰 등을 통해 “매우 힘들었던 시기다. 당시엔 번민이 많았다. 내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통제하는 것 같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유럽 왕실 일원이 건강 이상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공주를 평범하게 키우고 싶어하는 왕세녀 부부가 스웨덴의 평범한 부부와 같은 육아방식을 선택했다.”


2012년 빅토리아 왕세녀의 육아 휴직 소식을 전한 스웨덴 언론의 보도 내용입니다. 빅토리아는 결혼 2년 만에 첫딸 에스텔을 낳았습니다. 그러면서 왕세녀로서의 공식적인 대외업무를 중단하는 6개월 간의 출산·육아 휴가를 받았습니다. 6개월이 끝나자 이번엔 남편 다니엘 공작이 육아휴직을 받았습니다. 에스텔 공주는 공립 보육시설에 보내져서 스웨덴의 보통 아이처럼 어울렸습니다. 둘째 오스카 왕자가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로 부부는 출산·육아 휴가를 번갈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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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빅토리아 왕세녀와 남편 다니엘 바스테르고틀랜드 공작. 첫딸 에스텔 공주와 아들 오스카 왕자. [스웨덴 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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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트레이너 출신인 다니엘 공작 뿐 아니라 빅토리아 왕세녀 자신도 스포츠를 즐기는 활달한 성격이다. 티레스타 국립공원에서 온 가족이 트레킹을 즐기는 모습. [사진 스웨덴왕실]


이들의 출산·육아 휴직은 ‘평범한 스웨덴 직장인’의 권리입니다. 스웨덴은 자녀당 총 480일의 유급 육아휴직을 인정하는데, 이 중 90일은 아빠가 사용하지 않을 경우 소멸한다고 합니다. 390일간 임금의 80%가 육아휴직 급여로 지급됩니다. 이를 통해 스웨덴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상위 출산율(2016년 합계출산율 1.85)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스웨덴은 2014년 기준 만 65세 이상의 노인인구가 184만명으로 전체인구(970만명) 중 약 20%에 이르는 초고령화 국가입니다. 초고령화·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총생산(GDP)의 2.9%를 양육지원예산으로 할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복지제도를 향유하기 위해 스웨덴 국민들은 엄청난 세금을 부담합니다. 스웨덴의 개인 소득세율은 최저 30%, 최고 45%입니다. 연간 43만 크로나(약 5600만원) 이상을 벌면 최고 세율을 적용하고 아무리 적게 벌어도 30%를 세금으로 냅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그만큼 되돌려 받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높은 세율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라르스 다니엘손 주 유럽연합(EU) 스웨덴 대사는 이런 선순환과 관련해 “내가 낸 세금이 제대로 쓰일 것이라는 믿음, 보육의 질이 좋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어야 아이를 낳고 맡긴다”고 설명했습니다(2018년 3월11일 중앙선데이 인터뷰). 빅토리아 왕세녀 역시 이런 국민적 신뢰를 앞서서 실천하는 왕족의 한 사람입니다. ‘세금 낭비’ 논란이 없진 않지만 그럼에도 스웨덴 왕실이 국민의 높은 지지를 누리는 이유 역시 이런 믿음과 모범적인 ‘성 평등’ 행보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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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의 차녀 마들렌 공주의 2013년 결혼식. 신랑은 영국 출신의 미국 금융인 크리스토퍼 오닐이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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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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