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4 (화)

[김창기의 음악상담실]수치심 느끼지 않아도 돼요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헤이즈 (Heize) ‘내가 더 나빠’

동아일보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요즘 수치심과 죄책감에 대한 소식들과 이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매우 불편합니다. 수치심을 느꼈고 아직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의 힘겨운 고백들이 수치심으로 인한 고통의 과정을 마치 교과서처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기에 그 고통이 가슴 깊이 전해져서 불편하고, 죄책감을 느낀다고 하는 사람들의 언행이 죄책감을 겪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 보이는 언행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어서 더 불편하죠. 잘못이 밝혀진 초기 단계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의 언행처럼 보이니까요.

수치심과 죄책감은 비슷하기에 구분이 잘 안 가고, 두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지만,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중요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길이 다르기 때문이죠.

수치심과 죄책감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수치심은 ‘자신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고, 죄책감은 ‘자신의 행동’에 초점을 둔다는 것입니다. 수치심은 내면의 가치가 무너질 때 느끼는 감정이라 자신의 근본적인 가치를 평가절하하게 만들죠. 하지만 죄책감은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친 안 좋은 영향을 후회하고, 피해자의 고통을 나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그 때문에 흔들린 자신의 가치는 물론 피해자의 가치도 회복하려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입니다. 잘못된 행동을 했지만 반성하는 좋은 사람이기에 근본적인 가치의 평가절하는 없죠.

수치심은 ‘나는 원래 나쁘거나 열등한 사람이다’라고 믿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더 큰 피해를 피하기 위해 굴복하고 나면 자신이 하찮고 비겁하고 무력한 존재로 느껴지죠. 그래서 수치심을 느끼면 먼저 그런 상황에서 도망치게 됩니다. 그 충격이 너무 컸다면 타인이 자신을 평가할 수 없는 곳에 숨는 회피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많은 성폭행 피해자가 그러하죠. 그러다 다시 그런 수치심을 느끼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어쩔 줄 모르고 얼어붙어 버리곤 합니다.

더 이상 숨고 물러날 수 없거나, 도움을 받아 반격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자긍심을 회복했다면, 수치심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을 공격하게 됩니다. 분노의 가장 큰 이유는 수치심이니까요. 내가 나쁘거나 열등한 것이 아님을, 나에게 수치심을 준 사람이 잘못한 것임을 증명하고 손상됐던 나의 가치를 회복하고 싶은 것입니다. 용서는 내 가치를 회복한 다음의 일이죠.

반면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분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인정하고, 그 책임을 지겠다고 결심하고, 피해를 받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사과하고 도우려 하니까요. 용서를 받고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다시 확인하는데 왜 화가 나겠습니까? 잘못에 대한 숨김없는 고백과 책임을 지는 언행, 비난을 감내하는 성숙한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야 그 죄책감이 믿기는 것입니다.

“넌 나쁜 놈이야! 널 저주해!”라는 노랫말이 대세인 요즘 “내가 더 나빠. 너보다 나빠. 네가 더 아파 더 아팠을 걸 이제 와 난 알아”라며 희귀하게 죄책감을 고백하는 ‘내가 더 나빠’는, 노랫말만이 아니라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멜로디와 편곡에서도 날이 서 있지 않은 후회와 사과와 관계회복을 원하는 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죄책감의 표현은 이런 진실한 고백과 사과를 노래의 후렴처럼 진심을 담아 최선을 다해 반복하는 것이죠.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