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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브리핑] '이 끔찍하고 엉망진창인 행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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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끔찍하고 엉망진창인 이 행성의 상태에 대해서 사과합니다. 그러나 여긴 언제나 엉망이었죠. '좋았던 옛날'은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 커트 보니것. 1994년 5월 8일 시라큐스 대학 졸업 축사

제가 드리는 말씀이 아니고, 미국작가 커트 보니것이 한 대학 졸업식에서 했던 말입니다.

그는 시대를 뛰어넘어 모든 청춘이 사랑했던 작가였습니다.

졸업식 연사로도 인기가 많아서 보니것의 졸업식 축사만을 모은 책이 출간되기도 했더군요.

그는 어설프게 위로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시니컬하게 풍자했고 절대로 사과하지 않는 세상을 이야기했습니다.

"끔찍하고 엉망진창인 이 행성"

이어지는 미투와…오늘 아침, 검찰조사를 받게 된 다섯 번째 전직 대통령의 모습과 함께 다시 떠오르는 문구였습니다.

전직 대통령도 수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민주주의의 진보임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어찌하여 우리에겐

행복한 전직대통령이 그리도 없는가…

짧았던 붉은 꽃이 지고 난 뒤의 참혹함은 짙고도 길어서 오히려 보는 이들의 마음을 절망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개봉한 < 리틀 포레스트 > 의 원작 만화에는 이런 문구가 등장합니다.

"삶은 나선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같은 곳을 뱅글뱅글 도는 것처럼 보여도

원은 차츰 크게 부풀고

그렇게 조금씩 나선은 커지겠지… "

- 이가라시 다이스케 < 리틀 포레스트 >

느리고 더디고 똑같은 것 같지만 끊임없이 갈망한다면…천천히 앞으로 나아감을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역설적으로 본다면 커트 보니것의 졸업식 축사 역시 마찬가지의 의미를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끔찍하고 엉망진창인 행성에서 버텨온 건 지금의 세대만으로도 충분하니…

다음 세대들이라도, 이 엉망진창의 세상에서 하루빨리 '졸업' 하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속뜻은 다를 수도 있겠으나.

오늘 검찰에 출석한 그 역시 졸업을…이야기했습니다.

"역사에서… 이번 일로 마지막이 되었으면"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손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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