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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프란치스코 교황 5년, 등장부터 파격…사회참여엔 적극적, 내부개혁엔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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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환경문제 등 관심…바티칸 개혁 추진했지만 성직자 성추문에 대응 미흡

한국 찾아 세월호 유족 위로…남북 화해 메시지 전하기도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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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의 수장 프란치스코 교황(82·사진)이 13일 즉위 5주년을 맞았다. 다수의 ‘최초’ 타이틀만큼이나 등장부터 파격이었던 그는 5년 동안 보수적인 가톨릭을 안팎에서 뒤흔들었다. 난민, 기후변화 등 사회문제에도 역대 어느 교황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러나 교회 내부 개혁에서는 큰 진척을 보지 못했고 성직자 성추문에 대한 대처가 미흡해 거센 비판을 사기도 했다.

■ ‘사상 최초’의 교황

“위선적인 가톨릭 신자보다 무신론자가 더 낫다.” 무신론자의 말이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말이다. ‘믿지 않으면 지옥’이라는 사고에 경종을 울렸다고 한 매체는 평했다. 즉위와 동시에 여성과 무슬림에게 세족식을 해 보수적인 교계를 놀래켰다. 즉위식에서는 고급 빨간 구두, 십자가 금목걸이, 레이스 장식의 수단 대신 낡은 검은색 구두와 철제 목걸이, 장식 없는 흰색 수단을 택했다. 당시 남성잡지 ‘에스콰이어’는 그를 올해의 베스트 드레서로 선정했다. 그가 타는 차는 포드의 소형차 포커스다. 이전 교황들은 대형 리무진을 사용했다. 이전 교황들과 달리 넓은 펜트하우스 대신 손님이 묵는 게스트하우스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생활한다.

그가 교황이 된 것 자체도 파격이다. 그에겐 ‘사상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많다. 사상 최초의 남미 출신이자 예수회 출신 교황이다. 13세기 ‘빈자의 성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교황명으로 사용한 첫 교황이기도 하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아르헨티나에서 가난한 자들의 목자로 활동해왔다. 대주교 시절 호화로운 관저 대신 허름한 아파트에서 살았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2001년 경제위기 중 정부의 시위대 강경 진압에 맞서는 등 경제 불평등을 방치하고 소외계층을 외면하는 정부에 우회적 비판을 지속했다. “낙수효과는 입증된 적 없는 가설”이라며 신자유주의를 비판했다. 이 때문에 그는 미국 보수층으로부터 ‘사회주의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런 그의 등장은 당시 로마 가톨릭이 처한 상황과 맞물리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성추문과 성차별, 관료주의 등으로 신자 수가 감소하던 상황에서 그는 개혁을 바라는 교인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큰 환영을 받았다. 취임 미사 때 100만명이 몰렸으며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는 신자 수가 갑자기 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효과’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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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참여로 세상에 울림을

교황이 된 그는 바티칸 개혁을 추진했다. 성직자 성범죄를 “사탄 숭배만큼 추악한 일”이라며 성범죄를 은폐한 주교를 해임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2014년엔 아동보호위원회를 설치했다. 냉전 시절 마피아들의 돈세탁 창구로 활용됐던 바티칸 은행도 개혁했다. 은행장에 민간 금융인을 앉혔고, 장부에 적혀 있지 않은 계좌 4800여개를 없앴다.

낙태나 동성애, 피임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전 교황들보다 전향적이었다. 2013년 “동성애자가 선한 의지를 갖고 신을 찾는다면 과연 그를 심판할 수 있겠는가”라며 동성애자 사제들을 옹호했다. 2016년엔 사제들에게 낙태 여성의 죄를 특별사면하는 권한을 영구적으로 연장했다. 빈민들에게 피임 기구를 나눠줬다 해임된 성직자 문제에도 개입해 보수 가톨릭 단체와 대립했다. 이혼했던 신자도 영성체를, 사생아도 세례를 받을 수 있게 했다.

여성에 대한 태도도 전임자들보다 전향적이었다. 2016년 여성 부제 허용을 검토하는 위원회를 창설했다. 부제는 사제를 보좌해 세례나 미사의 일부를 수행하는 직위로, 기원후 5세기 이후 여성의 서품이 금지됐다. 세족식에도 여성이 참여할 수 있게 교령을 내렸다.

타 종교에도 개방적이었다. 취임 당시 무슬림 여성의 발을 씻겨준 그는 2016년 이슬람 수니파 최고지도자 셰이크 아흐메크 알타예브와 만났다. 9·11테러 발생 한 해 전인 2000년 이후 16년 만에 두 종교의 수장이 얼굴을 맞댔다. 지난해엔 “아브라함이 남긴 세 종교의 성지는 신성하게 지켜져야 한다”며 이스라엘 주재 미국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을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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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참여에도 어느 교황보다 적극적이었다. 그가 빈곤 문제만큼이나 관심을 보였던 대상은 난민이었다. “이웃의 고통에 둔감해선 안된다” “예수도 난민이었다”고 한 그는 2016년 바티칸 특별미사에 빈민과 난민 6000여명을 초대했다. 시리아 난민 12명을 바티칸으로 데려오기도 했고, 로힝야 난민을 ‘형제·자매’라 부르며 국제사회의 대응을 촉구했다.

2014년 미국과 쿠바의 막후 중재자로 나서 그해 말 양국의 국교 정상화를 이끌어 냈다. 2015년 “지구는 ‘우리 공동의 집’”이라며 화석연료 사용 자제를 촉구하는 기후변화 회칙을 발표했다. 콜롬비아에는 정부와 반군 간 평화협정을 방문 조건으로 제시하며 2016년 반세기에 걸친 내전을 끝내는 데 공헌했다.

2014년 요한 바오로 2세 이후 25년 만에 한국을 방문해 세월호 유족들을 위로하고 남북 화해의 메시지를 전했다. 북핵 위기가 고조되던 2017년엔 “핵전쟁으로 인류가 자살 위험에 처했다”고 경고했다.

교황은 “의인도 가톨릭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했으며 ‘신을 믿지 않는 이들을 신이 용서할까’라는 물음에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고도 했다.

■ 근본적 교회 개혁은 미흡

그러나 교회 내부 개혁의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가 설치한 아동보호위원회는 파행을 거듭했다. 위원회에 참여했던 성추행 피해자 피터 사운더스는 “(아동보호위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며 2016년 2월 사임했다. 마리 콜린스 위원도 지난해 3월 사퇴했다. 그는 “교황이나 바티칸의 말은 좋았다. 문제는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했다. 바티칸 은행에 대한 개혁 역시 근본을 건드리지 못했다. 행장을 바꾸고 유령 계좌를 정리했지만 이전의 횡령·부패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못했고, 불법 자산에 대한 몰수 조치도 없었다.

여기엔 교황청 관료 조직의 반발이 한몫했다. 지난해엔 보수 가톨릭 단체와 대립한 교황을 비난하는 벽보가 바티칸 시국 거리에 나붙기도 했다. 개혁 조치에 대한 보수 신자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 전문매체 크룩스의 편집자 존 앨런 주니어는 “교황은 (개혁적 메시지를 말하지만) 분명 보수적이기도 한 사람”이라고 했다. 여성 부제 서품을 검토하겠다던 교황은 정작 여성 사제에 대해서는 “영원히 허용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동성애자를 심판하지 못할 것”이라 했지만 동성 결혼 자체는 반대한다. 추기경 시절인 2010년, 동성 결혼과 낙태 시술 합법화를 두고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대립했다. 성범죄 피해자들을 주기적으로 만나지만 성추문 의혹 사건 공개를 금지한 교회법엔 손대지 않았다. 최근에는 성직자 성추문 대처와 관련해 비판을 사기도 했다. 성추문 은폐 의혹이 제기된 후안 바로스를 2015년 칠레 오소르노 교구의 주교로 임명하고, 최근까지도 옹호하면서다. 앨런은 “교황은 교리문답서를 아직 토씨 하나 바꾸지 않았다”며 “논쟁적인 이슈들에서 자신을 ‘교회의 충성스러운 아들’로 규정한다”고 했다.

교황은 보수와 진보, 교계 안팎 모두에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대중적 인기는 아직 견고하다. 지난 1월 남미 순방 때는 교황을 보기 위해 아르헨티나 신자들이 칠레로 원정을 떠났다. 교황의 트위터 팔로어는 1500만명이 넘는다. 트윗 1개당 평균 1만회 이상의 리트윗이 발생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계정 중 하나다.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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