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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허연의 책과 지성] 이븐 시나 (980~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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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지구의 중심에서 천국의 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수수께끼를 풀었으나 인간의 운명이라는 매듭은 결국 풀지 못했네

현대 의학은 유럽 의학이다. 맞는 말이다. 지금 전 세계 병원에서 활용되는 의학적 전문지식, 즉 인체에 대한 분석, 각종 질병의 원인과 치료법은 유럽에서 발견하거나 개발한 것들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역사가 하나 숨겨져 있다.

근현대 의학을 탄생시킨 16~18세기 유럽 의과대학들이 제1교과서로 삼은 책이 있다. 이븐 시나(Ibn Sina)의 '의학정전'이었다. 유럽 유수의 대학들이 수세기 전 이슬람 학자가 쓴 책을 수업 교재로 썼던 것이다.

'의학정전'은 철학자이자 의사였던 이븐 시나가 11세기에 쓴 책이다. 책은 최초의 안구 해부도가 수록돼 있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또한 심리 상태에 따라 병의 진행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병을 옮기는 미생물과 바이러스의 존재를 알렸다.

이븐 시나는 어떻게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에 이 같은 의학 교재를 쓸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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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슬람 세계는 여타 문명권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지적으로 융성했다. 의무적으로 코란을 배워야 했던 그들은 어려서부터 학문의 기초인 읽고 쓰기를 생활화했다. 성직자 외에는 성경을 읽고 필사할 수 없었던 같은 시기 기독교와는 너무나 달랐다. 기독교 세력이 어둠 속을 헤맬 때 이슬람은 수학, 철학, 천문, 지리, 의학 등 전 분야에서 세상의 비밀을 발견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이슬람이 전해준 지식 때문이었다. 이 같은 환경이 이븐 시나라는 지성을 탄생시키는 토양이 됐다.

이븐 시나 개인의 천재성도 한몫했다. 서양인들이 아비센나(Avicenna)라고 부르는 이븐 시나는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코란을 통달했고, 17세에 왕실 도서관의 책을 모두 외워버린 그는 독자적으로 세상의 수수께끼들을 풀기 시작한다. 그의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지구의 중심에서 천국의 문에 이르기까지/ 나는 오르고 또 올랐네/ 그사이에 수많은 수수께끼의 매듭을 풀었으나/ 가장 큰 매듭, 사람의 운명이라는 매듭은 풀지 못했네."

그는 '학문의 서' '치유의 서' '공정의 서' 등을 비롯해 평생 242권의 책을 남겼는데 그리스 철학과 코란을 조화시킨 그의 사상은 중세 유럽 철학의 설계도가 됐다.

이븐 시나는 모든 유일신 종교가 당면했던 문제에 해법을 제시했다. 맹목적인 신앙과 합리적 사고, 둘 다를 수렴하는 매뉴얼을 찾은 것이다. 그는 "능동적 지성만이 신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지성이 발달할수록 신앙에 더 가까워진다는 논리였다. 이성도 신앙도 포기하지 않는 절묘한 '출구전략'을 제시한 셈이었다.

그의 태도는 당대에는 비판을 받았다. 한쪽으로부터는 이성을 비하했다고 욕을 먹고, 다른 쪽으로부터는 전지전능한 신을 부정했다고 욕을 먹었다.

하지만 그의 인식론은 결과적으로 비슷한 문제를 고민하던 중세 기독교에 한 줄기 빛을 던져줬다. 그의 이론은 스콜라학파의 전범이 됐고, 프란체스코파를 비롯한 수도원들의 실천 철학으로 자리 잡았다.

이븐 시나는 자기를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를 나눈 희대의 지성이었다.

그의 책 '치유의 서'에는 "육체는 여행의 목적이 달성됐을 때 떠나보내야 하는 짐승"이라는 심오하게 번뜩이는 문장이 등장한다.

연금술이나 신봉하던 당시 유럽인보다 그가 얼마나 앞선 세상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구절이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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