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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흑갈색 저고리, 검은 버선... 흑인 혼혈 소녀가 입은 한복, 이렇게 고울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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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흑인 혼혈 소녀 모델이 입은 아름다운 우리 옷, 한복
인도 사리로 만든 치마와 장옷, 검은색 버선 등 파격
한복, 현대적으로 해석해온 디자이너 김영진과 스타일리스트 서영희 합작품

조선일보

디자이너 김영진과 스타일리스트 서영희가 공개한 한복 화보. 흑인 혼혈 모델 배유진(16세)이 참여해서 기존의 한복의 고정관념을 깬 글로벌한 그림이 나왔다./사진=김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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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을 디자인하면 우주를 디자인할 수 있다, 는 말이 있다. 핏(fit)으로 조이는 옷이 아니라 무한대로 펼치는 옷이어서다. 치파오와 기모노는 몸과 옷감 사이에 공기층이 전혀 없을 정도로 스키니해 움직임이 한정되는 반면, 한복은 정말 바람을 타고 우주로 날아갈 듯 그 디자인이 전위적이고 호방하다.

한복의 현대화를 시도해왔던 디자이너 김영진과 관록의 스타일리스트 서영희가 최근 한복에 본격적인 날개를 다는 작업을 시도했다. 두 사람의 순수한 의기투합으로 만들어진 이번 한복 화보에는 흑인 혼혈 소녀 배유진(16세)이 모델로 등장한다. 사진에서 보듯 흑진주처럼 검은 피부, 과감한 커팅의 간난이 머리와 어우러진 흑갈색 저고리, 검은색 버선, 길게 늘어진 당의, 붉은 말군 바지, 풍부한 버슬이 들어간 치마와 인도 사리 원단으로 만든 장옷 등 그 파격적인 우아함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한복이 세계 무대에 첫 데뷔한 것은 1994년 파리 프레타 포르테에서였다. 맨발에 저고리 없이 홀로 선 이영희의 한복 드레스는 패션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르 몽드'지는 한복을 일컬어 ‘바람의 옷’이라고 표현했다. 알고 보면 패션 한류의 원류도 한복인 셈. ‘한복을 바람의 옷이자 흙의 옷’이라 명명했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무주 전주 유니버시아드 개회식에서 캐나다의 두 여성 스키어에게 한복을 입히고 눈밭에서 곡예 점프를 선보이도록 했다. 옷이 날개라면 한복은 최고의 날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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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푸른빛의 타프타 실크 드레스와 인도 사리 원단으로 제작된 장옷, 마찬가지로 사리 원단으로 만든 말기 치마와 그 안의 레이스 치마, 뉴똥 속바지가 경쾌하다. 검정 생고사 저고리와 버슬 라인이 극대화된 치마가 멋스럽다./사진=김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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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김영진은 그동안 한복을 가뒀던 ‘정통’의 틀에 ‘월드 와이드 패션’이라는 디자인의 물꼬를 트고자 했다. “전통 한복이라고 할 때 그 전통의 기준이 어디일까 공부를 해봤어요. 18세기 후반의 신윤복 미인도에서의 대담한 한복인지, 16세기 후반의 장저고리인지, 1960년대의 일상적인 한복인지… 공부할수록 한복은 패션이고, 그 모양은 디자이너가 하기 나름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기록에 보면 조선 시대 사대부가의 부유한 여인들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비단으로 한복을 해 입었다. 현대의 한복이라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원단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김영진은 상주 명주, 숙고사, 갑사, 진주사 등 전통 원단에 프랑스 레이스 원단과 이탈리아 꼬모에서 공수한 명품 원단(오스카 드 라렌타, 디올 등의 꾸띄르 드레스에 쓰이는)을 믹스해서 한복을 만들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녀가 전개하는 브랜드 ‘차이 김영진’은 예컨대 한복계의 베트멍(전위적인 디자인으로 핫해진 글로벌 명품 브랜드)같은 존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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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검정 생고사 치마 위에 아이보리 긴 당의, 붉은 안고름이 길게 늘어진 머메이드 라인의 드라마틱한 치마, 진주 칼춤에서 영감을 받은 화려한 색채의 한복./사진=김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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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업에서는 큰 공작과 꽃이 그려진 인도 실크 원단도 등장한다. 인도 전통 옷 사리를 만드는데 쓰는 천으로, 김영진과 서영희가 인도 여행에서 함께 사 온 것들이다. “한 사람분의 사리가 한 팩에 들어 있었어요. 그걸 컬러별과 문양별로 다 사 왔는데, 이 정도의 글로벌한 원단을 소화하려면 흑인 혼혈 모델이 좋겠다 싶었죠.” 스타일리스트 서영희가 말했다. 서영희는 그동안 한복을 현대적인 복식으로 해체 재조립하는 등 그만의 독창적인 손맛으로 현대적인 스타일링을 선보였다. 그녀는 2016년 파리 장식미술관에서 열린 ‘코리안 나우'의 전시를 맡아 한복과 한국 복식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린 바 있다.

재해석된 패션 한복에선 서양 옷의 입체적 규격을 훌쩍 뛰어넘는 시각적 포만감이 느껴진다. 평면 재단, 풍부한 컬러 그리고 스트링(끈)이 주는 무한대의 해방감이다. 알고 보면 한복은 컬러도 입는 법도 무한대다. 고유한 형태 감은 있지만, 스트링으로 12폭 치마 길이를 조절하면 다양한 조형이 가능하다. 치마 뒷자락을 앞으로 할 수도 있고, 드레이핑도 자유자재로 잡혀서 무척 기능적이고 관능적이다. 얌전해 보이지만 대담하고 섹시한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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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철릭 원피스와 천연 염색한 삼베 거들 치마가 은은하다. 피부색에 맞춰 버선은 검은색으로 만들었다. 대담한 기운을 뿜는 붉은 말군바지, 화사한 살구빛 실크 철릭 원피스 안에 스란 치마를 입었다./사진=김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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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희와 김영진이 협업한 화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더욱 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저고리와 치마, 속바지 등이 만들어내는 직선과 곡선의 풍만한 조형, 경계 없는 배색의 힘센 충돌, 갓난이 머리를 한 블랙 스킨 모델의 쿨한 태도, 피부색과 매칭을 이루는 검은 버선은 당장 파리 오뜨 꾸띄르 무대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 꽃자주색 생고사 저고리는 혹한 뒤에 봄을 알리는 동백꽃 같고, 16세기 거들허리 치마에서 영감을 받은 조형적인 인어 치마는 얼마 전 이 두 사람이 정구호와 함께 올렸던 오페라 ‘동백 아가씨' 의상의 원형인 듯 하다. 얇은 실크 안으로 비치는 스란치마의 다정함, 노란색 뉴똥 속바지의 경쾌함, 오랑캐쯤은 중원으로 날려버릴 듯한 빨강 말군 바지의 용맹함은 또 어떤가.

“한복 입은 엄마를 보고 자란 세대라 한복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요. 그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유니버설하게 보여주고 싶달까. 일부러 속바지는 컬러풀하게 버선은 검정으로 매칭을 해봤어요. 디올 전시에서 드레스를 보고 몇몇 스타일링의 영감도 받았습니다. 여러 형태의 복식을 다뤄왔지만, 결국 제 스타일링의 정점은 한복인 듯합니다.”-서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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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김영진과 스타일리스트 서영희.


“피카소가 전통적인 데생을 수련해 입체파를 창조했듯이, 전통은 장인의 영역으로 존중하되 저는 디자이너로서 파격을 시도해야죠. 남성 무관의 옷인 철릭을 만들고 해체한 후에야 여성용 철릭 원피스를 만들 수 있었던 것처럼요. 젊은 시절, 공연예술계에 있어서 그런지 한복을 다루는 틀이 더 넓고 다이내믹해요.”-김영진.

특별히 혼혈 소녀 배유진은 정제된 몸짓과 표정으로 한복의 선과 색을 극대화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한복 치마 안에서 풍기는 몸의 기운은 한국무용수의 그것처럼 밀도가 높다. 색채 대비를 위해 실제의 피부색보다 좀 더 검게 분장했지만,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역사를 배우는 다문화 가정 출신의 매력적인 한국인 모델이다.

김영진과 서영희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이 화보를 보고 한복을 더 즐겁게 입어주길 바랐다. 그것은 패션의 추구인 동시에, 한복이 지닌 우리 정서의 뜨거운 오지랖! 그리하여 서양 테일러링에 기반을 둔 어떤 옷보다 우리 옷 한복이 만들어내는 패션 신(Scene)은 이토록 역동적이고 전위적이다.

[김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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