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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쿨’해진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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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과 예술단, 응원단의 방한 행적은 북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깼다. 트집잡기, 신경전, 허세가 사라지고 ‘쿨(cool)’해졌다. 북한 응원단의 응원도구를 한국언론이 ‘김일성 가면’이라고 보도해도, 만경봉호가 기항한 묵호항과 서울시내에서 반북 시위대가 인공기와 김정은 사진을 불태워도 북한은 그냥 넘어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 현수막이 비에 젖은 것을 북한 응원단이 발견하고 울부짖던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 때와는 천양지차다. 삼지연 관현악단은 북한 노래에서 시빗거리가 될 만한 가사는 모두 뺐고, 소녀시대 멤버와 합동공연을 해 달라는 청와대의 갑작스러운 요청도 수용했다.

고전적인 헤어스타일에 수수한 옷차림으로 한국을 방문한 김여정은 예의와 성의로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평창 올림픽 개회식에서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흐르자 일어나 예를 갖췄다. 한국 고위인사가 북한에서 인공기 게양 때 그랬다면 보수세력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을 일이지만, ‘외교란 이런 것’임을 김여정은 쿨하게 보여줬다.

북한은 1월9일 판문점 고위급회담에서도 기싸움 없이 속도전으로 회담을 진행했다. 남북관계를 취재하던 2000년대 초반과는 전혀 딴판이다. 어떤 이들은 ‘북한이 보여준 모습 그대로 믿어선 안된다’고 한다. 일본어의 혼네(本音·속마음)와 다테마에(建前·표면적인 태도)로 표현하면 북한이 보여준 건 ‘다테마에’일 뿐이라고. 하지만 본심과 겉모습을 늘 일치시키는 나라도 있던가. 외교무대야말로 ‘다테마에’의 경연장 아닐까.

북한의 대남태도가 쿨해진 데는 여러 분석이 있을 수 있다. 경제제재의 압박이 커지고 미국이 군사공격까지 검토하는 엄중한 정세를 돌파하기 위해 남북관계 복원에 나선 만큼 판을 깨지 않으려 각별히 조심했던 것 같다. 남남갈등이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대화에 응한 문재인 정부를 배려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쿨해진 북한’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남북관계가 단절되고 북핵에만 이목이 쏠려 있던 김정은 정권 7년간 북한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도 들여다봐야 한다.

이 시기 북한은 ‘유격대 국가’나 다름없던 상태에서 정상국가로 조금씩 이행해 왔다. 올림픽 개막 전날 열병식이 열린 북한군 창건기념일(건군절)이 ‘비정상화의 정상화’의 좋은 예다. 원래 창군일은 1948년 2월8일이었지만 김일성이 중국에서 항일유격대를 조직한 날(1932년 4월25일)로 1970년대에 변경됐다. 김정은이 2015년에 이를 원위치시켰고, 올해 2월8일 70주년을 기념해 열병식을 개최한 것이다. 북한의 역사와 제도를 김일성 우상화에 동원하던 선대의 극단주의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다.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국무위원장’이란 직함을 썼다. 여전히 낯선 직함이지만 최고지도자가 ‘국방위원장’이던 선대의 어색함에서는 벗어났다. 김정은은 김정일과 달리 매년 신년사를 직접 발표한다. 지난해 신년사에선 “언제나 늘 마음뿐이었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다”고 북한 주민들에게 사과했다. ‘무오류’의 주체사상과 강성대국을 부르짖던 예전 북한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세습 독재체제에 핵·미사일로 국제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본질은 그대로지만 적어도 나라 전체에 만연했던 ‘허세의 거품’은 줄어들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000년은 식량난 극복을 위한 ‘고난의 행군’이 한창일 무렵이다. 이 고비를 넘기며 북한경제는 조금씩 회복됐고, 2010년대 북한식 개혁·개방조치로 탄력이 붙었다. 김정은은 2013년 전국 각지에 경제개발구를 조성하는 경제개방을 선언했고, 각 부문에서 인센티브를 허용하는 개혁으로 생산력을 높였다. 최근 방북한 이들은 90년대 중국 못지않은 활력이 느껴진다고 전한다. 덩샤오핑(鄧小平)이 주도하던 70년대 말 개혁·개방 초기단계를 넘어섰다는 얘기다. 과거의 북한은 한국의 대북지원을 받아야 할 처지이면서 자존심을 잃지 않기 위해 허세를 부려야 했다. 대남태도가 쿨해진 건 나아진 경제형편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외신들은 김여정을 두고 “올림픽에 ‘외교댄스’ 부문이 있다면 김여정이 금메달 후보”(CNN 보도)라고 했다. 김여정은 2박3일 내내 반북 캠페인만 벌이다 돌아간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의 대결에서 압승했다. 펜스만이 아니다. ‘올림픽 주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참가국의 국기를 불태우던 반북 시위대와, 북한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시빗거리 찾기에 바빴던 보수세력도 참패했다. ‘의문의 1패’가 아니라 여지없는 1패다.

<서의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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