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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문화와 삶]기억의 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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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누구나 한번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과거의 장소를 찾았을 때 그곳이 기억에 남은 장소와는 달라 놀랐던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건 성인이 되어 투표를 위해 고향을 찾았을 때였다. 투표장은 내가 다닌 초등학교였는데 기억에 남은 것과 달리 운동장이 퍽 작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광활하다 할 만큼 컸던 것만 같은데 나이를 먹고 다시 보니 작고 평범한 운동장일 뿐이었다. 세월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 때때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새삼스럽기는 했으나 놀랍지는 않았다. 기억과 실재의 차이를 자연스레 인정하게 되어서였던 듯하다.

그리고 며칠 전 사십여년 동안 기억에만 있던 장소를 찾게 되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부모님과 더불어 사십여년 전 당신들이 살았던 셋집을 찾은 거였다. 그 시절 당신들은 세 살짜리 아들 하나를 슬하에 둔 삼십대의 젊은 부부였고 셋집 주인은 사십대의 부부였다. 부모님은 그 시절을 가장 찬란했던 순간처럼 회상하곤 했던 터라 나는 언제든 기회가 되면 그 옛집을 더불어 찾아가고 싶었다. 물론 그 집을 단번에 찾은 건 아니었다. 우선은 당신들의 기억에 남은 마을 이름에 의지해 그런 이름을 지닌 마을을 찾아간 뒤 마을회관에 들렀다. 다행히 그곳에서 당신들보다 나이 든 노인 한 분이 셋집 주인의 이름을 기억해주었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다른 마을이라는 것도 일러주었다. 그곳을 찾아가다 들른 삼거리 슈퍼 주인은 더 자세하게 알려주었고 그 뒤로는 별로 헤매지 않고 그 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당신들은 옛 마을에 들어서자 기억이 났던 모양인지 바로 여기라며 장담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무척 어린 시절에 살던 곳이어서 내 기억에는 몇 가지 인상으로만 남았던 터라 사십여년 만에 찾은 그곳이 낯설기만 했다. 내가 지닌 몇 가지 인상이라는 것도 초라하기 짝이 없어서 그 집이 무척 크고 대문이 높고 마당이 그윽했다는 등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옛집에 이르렀다.

기억에 남은 것과는 다르리라 짐작은 했지만 달라도 너무 달라서 마음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형적인 ㅁ자 구조의 집이라는 건 기억과 같았지만 작아도 너무 작았다. 대문 양쪽으로 문간방이 달리고 집채가 작은 마당을 둘러싼 형태였는데 마당도 두어 평에 지나지 않아 햇빛이 겨우 들 만큼 조붓했다. 노인은 돌아가신 지 조금 되었고 노부인이 살아 계신 터라 부모님은 노부인과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 나왔다. 나오기 전에 우리가 머물렀던 대문 오른쪽 문간방을 들여다보았다. 층이 진 두 칸짜리 방이었는데 손바닥만 한 창이 하나 달렸을 뿐이어서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그러니까 사십여년 전 그 방에서 삼십대의 하사관과 그의 부인 그리고 그들의 세 살짜리 아들이 꿈을 꾸며 잠들곤 했던 거였다. 노부인은 다시 찾아오겠다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말로 찾아온 사람은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고 마당으로 내려앉은 한 줌 햇살 속에서 어린 시절의 내가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집을 다녀온 뒤 한동안 나는 이런 의문에 사로잡혔다. 기억에 남은 집과 실제로 찾은 집이 그처럼 달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섯 살인 딸아이는 이즈음 사물의 크기를 가늠할 때 아빠인 나를 기준으로 삼는다. 커다란 차가 지나갈 때면 아빠보다 크다 하며 놀라고 무언가를 설명할 때도 아빠보다 크거나 작다, 아빠보다 힘이 세거나 약하다 식이다. 아마도 그러했으리라. 기억의 집은 집으로만 구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장소나 사물을 실제보다 크고 아름답고 멋지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곳에 깃든 정서가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서 꿈을 꾸며 살았고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곳이기에 기억 속에서 그곳은 언제나 아름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난하고 고된 시간이라 할지라도 사랑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이든 장엄한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무엇을 기억하든 실제로 기억하는 건 사람과 사랑뿐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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