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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노혜경 칼럼] 귀신이 고칼로리 - 김일성 가면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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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노혜경
시인


어떤 말들은 “한 종족이라 말이 같다”는 그 ‘말’에 해당이 되나?라는 뜬금없는 의문이 생겼다. “김일성 가면 대소동”이라 이름 붙임 직한 소동을 보면서다. 한 언론사가 가면 기호를 김일성 얼굴로 오독하여 기사로 썼고, 그로 인해 정치적 이념적 진영에 따른 해석싸움이 전개되었다.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이라, 성서의 수많은 고사 중에 창세기 11장 첫머리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가 가장 흥미롭다. 예전엔 사람들이 같은 말을 썼지만, 그들이 도시를 세우고 하늘에까지 닿는 탑을 쌓기 시작하자 신이 그 모양을 보고 사람들의 말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뒤섞어 놓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놓아 서로 듣지 못하게 해야겠다.”(공동번역 창세기 11장 6-7절)

이 고사는 해석자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되지만, 가장 문학적인 해석은 인류가 언어가 서로 다른 수많은 종족이 된 이유를 설명하는 기원설화라는 것이다. 어떻든 “한 종족이라 말이 같다”는 것이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다는 야훼의 판단 근거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과연 우리는 지난 며칠간 “한 종족이라 말이 같다”는 것의 위력을 실감하는 중이다. 말은 문자로 종이에 새겨질 수 있는 납작한 기호만이 아니다. 표정과 몸짓도 말이고, 가슴에 단 배지나 유니폼도 말(언어)이다. 한 종족이 구음, 즉 입말을 본으로 삼고 소통하는 과정에 새겨지는 모든 약속은 말을 만들고 지킨다. 올림픽 단일팀을 불과 며칠 만에 구성할 수 있었던 것도, 북에서 내려온 김여정과 김영남이 심지어 눈물과 미소로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던 것도 “한 종족의 말”이 포함하는 공통감각은 힘이 세다는 것을 알려준다. 외교에서 의전이 그토록 복잡하고 정교한 것도, 다민족 다문화 국가인 미국이 유난히 많은 상징과 스토리텔링으로 공통기억을 만들려 애쓰는 것도, 말이 뒤섞인 상황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문득, 어떤 말들은 “한 종족이라 말이 같다”는 그 ‘말’에 해당이 되나?라는 뜬금없는 의문이 생겼다. “김일성 가면 대소동”이라 이름 붙임 직한 소동을 보면서다. 한 언론사가 가면 기호를 김일성 얼굴로 오독하여 기사로 썼고, 그로 인해 정치적 이념적 진영에 따른 해석싸움이 전개되었다. 실제로 그 가면의 모델이 누구냐가 아니라 누가 한 해석이 맞느냐로 서로 각축한다. 어려운 말로 ‘미끄러지는 기표’가 되어버렸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북한의 사정상 그것이 김일성 가면이 맞을 수는 없지만 만일 맞다면 북한은 그동안 많이 자유로워졌다는 표징이 되고, 실제로는 그냥 기자가 ‘뻘짓’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가면을 불태워보아 확인하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발화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청자가 들은 메시지 사이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 소통임에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있는 중간매개자(해석자)가 ‘자기가 듣고자 하는 것’을 ‘들었노라’고 주장한다. 소통하지 않겠다는 강렬한 주장이다. 특정 기표의 정치적 이용 실태 보고서를 보는 기분이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사용한 말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현장의 입말이다. 개역성경은 이를 구음(口音)이라 표기하여 명확히 했다. 근대문명은, 구음이 아니라 문자로 된 말이 지배하면서 이루어진 문명이다. 문어는 시공간을 넘어서는 말이다. 인쇄기술이 발명되고 책이 대량생산되면서 지식이 지배계층을 넘어 널리 보급되는 과정은 분명 민주주의가 성장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입말에 새겨진 공통감각이 축소되고 명확히 규정될 수 있는 개념언어, 즉 이성적 언어의 위력이 증가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표정과 몸짓, 되묻기 등을 통해 가능했던 소통의 범위가 축소되는 대신, 목소리와 육체의 위엄이 장악하던 의미 관철의 위력을 읽기 능력이 있는 해석자의 권위가 대체했다. 공정해야 하고 진실해야 할 해석자들, 매개자들이 문법적 규칙을 위반하고 정치적 진영, 이념적 지형에 따라 언어를 마음대로 부려 쓰는 것이 분단이란 말의 의미일까?

서로 다르게 해석되는 같은 글자, 소리는 같으나 정치적 의미는 정반대인 말들. 이는 끔찍한 일이다. 입말을 글말로 옮길 때 발생하는 참변을 쓴 유행하는 농담이 있다. “골이 따분”한 분들이 눈을 “불알”이며 “일해라 절해라” 하니 “귀신이 고칼로리.” “김일성 가면 대소동”이야말로 “귀신이 고칼로리”가 아닐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말의 본디 고사대로, 아무말대잔치를 자꾸 하다 보면 귀신처럼 곡을 하게 된다. 말 아닌 말이 횡행하니 마음이 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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